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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11.27 17:03:44- 김수복(1953년~) 사람 곁을 떨어져 나간 ‘답게’ 사람답게 한 마리 썰물 빠져나간 뻘밭에서 옆으로만 옆으로만 기어가다가 자갈밭에 턱이 부서진 채로 헤매고 있네보름 달빛 받들고 앞발 들어 환호하는 꽃답게들 평화답게들 통일답게들 나라답게들 아름답게들 사람답게들 잘 살라고“버림받고, 부수어지고 분노를 터트려” 바로 서서 앞발을 드는 갯벌답게 동해 대개, 서해 꽃게, 남해 칠게, 제주 홍게, 파주 참게는 들어봤어도 -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11.20 17:20:48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 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 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 -
한 점 해봐, 언니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11.13 17:26:18한 점 해봐, 언니, 고등어회는 여기가 아니고는 못 먹어. 산 놈도 썩거든, 퍼덩퍼덩 살아 있어도 썩는 게 고등어야, 언니, 살이 깊어 그래, 사람도 그렇더라, 언니,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도 썩는 게 사람이더라, 나도 내 살 썩는 냄새에 미쳐, 언니, 이불 속 내 가랑이 냄새에 미쳐, 마스크 속 내 입 냄새에 아주 미쳐, 언니, 그 냄샐 잊으려고 남의 살에 살을 섞어도 봤어, 이 살 저 살 냄새만 맡아도 살 것 같던 살이 냄새 -
꽃집에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11.06 17:34:30- 장석남(1965~)나는 꽃이 되어서 꽃집으로 들어가 꽃들 속에 섞여서 오가는 사람들을 맞고 오가는 사람들로 시들어, 시들어나는 빛이 되어서 어둠으로 들어가 어둠 속에 숨어서 오가는 숨결들을 비추고 오가는 숨결들로 시들어, 시들어나는 노래가 되어서 빛나는 입술로 들어가 가슴에 잠겨서 피어나는 꿈들을 적시다가 오가는 꿈들로 시들어, 시들어 꽃집이여 꽃집이여 혀와 입술을 파는 집이여 마른 혀와 마른 입술을 파는 집이 -
느릅실 할머니와 홍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10.30 17:31:56- 신광철(1959~)인생이 짐이라고 아니야, 사랑이야 인생은 홑이불 같이 가볍기도 하지만 비에 젖은 솜이불 같기도 한 거야 등이 굽었지만 앞산보다는 덜 굽은 진천 느릅실 할머니가 장작을 나르며 말했다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렸지 인생을 등에 지면 짐이 되고 가슴으로 안으면 사랑이 되는 거야 짐이 홑이불처럼 가벼워지지 농익은 홍시가 떨어지고 있었다 석양에는 홍시의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자식도 등에 지면 짐이지만 자 -
나팔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10.23 17:19:42- 이용헌 나팔꽃 줄기를 따라 내려가면거기,아무도 몰래 지어놓은지하방송국이 있다. 세상 밖 전하고픈 깜깜한 소리들을향기와 빛깔로 바꾸어 송출하는벙어리지하방송국이 있다.저 지하방송을 즐겨듣는 사람들은 울타리마다 알록달록 스피커를 올린다. 빨랫줄을 가야금 줄처럼 2층까지 길게 매어도, 레, 미, 파, 솔~ 소리 계단을 만들기도 한다. 이슬 맺힌 얇은 스피커에서 ‘아침의 영광’이라는 시그널 뮤직이 울려 퍼지면 사람 -
소를 웃긴 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10.16 17:17:18- 윤희상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 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 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나주 들판만 그런 게 아니더이다. 나도 곳곳에서 소를 웃긴 꽃을 보았소. 어릴 적 들판에 몰고나간 소들도 풀을 뜯으며 웃고 있더이다. 몽골 초 -
농담 한 송이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10.09 16:56:59- 허수경(1964~2018.10.3)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누가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에 가서 농담 한 송이를 따올 수 있겠는가?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이 엷은 미소를 띠고 말하는 농담은 어찌 ‘한 송이’가 아니겠는가? 그 한 송이의 근원이 슬픔일진대 아리고, 비리지 않을 수 있 -
라 라 라 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9.18 17:18:56- 신현정 오늘이 모자라면 모자처럼 날아가고 모자처럼 하모니카 불고 모자처럼 새 되어 모자처럼 옆으로 돌려 쓰고 모자처럼 구름 위에 올려놓고 모자처럼 뒤집어서 새도 꺼내고 토끼도 꺼내고 사과도 꺼내고 오늘이 모자라면 라 라 라 라 모자처럼 공중에 높이 던졌다 받으며 라 라 라 라. 오, 모자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없다. 모자 속에서 나오는 것이 새와 토끼와 사과뿐인가? 모자 속에서 숙녀가 원하는 장미꽃과 신사가 -
큰 거짓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9.11 17:29:58- 박재연야! 죽는 게 궁금하다 만구에 어째라는 건지 당최 모르겠다아마 꽃가마가 당도할걸? 보고 싶은 사람들이 나래비로 죽 서서 가마에 태우고 구름 위로 사뿐 날아갈 거야으하하하………그렇다면 오죽 좋겠냐그렇다니까, 내 말을 믿어요어머니 떠나실 때 압축파일 주머니에 큰 뻥 하나 넣어드렸다시인이 뻥치시니 한 뻥 쳐볼까? 나는 사실 도둑이다. 어느 날 우주를 훔쳤다. 둘 곳을 궁리하다 눈꺼풀 곳간에 넣어두었다. 봐라, -
오카리나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9.04 17:29:09- 강정이 어린 새 오카리나 뾰족 내민 주둥이를 불어 본다 구멍구멍 내가 빠져 나온다 하늘에 대고 소리치고 싶던 울분이 나오고 예순 살 모래바람으로 사라진 엄마도 송도바다 세레나데 부르던 첫사랑도 나온다저것이 들숨날숨으로 나를 빚어 마구 허공에 뿌려대니 부웅 부운浮雲- 꽃이 되고 나비 되고 바다 되고 바람이 된다그래 그래 악다구니 삶도 물결무늬 삶도 우리 돌아갈 한 줌 흙 아니냐며 엉긴 가슴 호- 불어주는 오카리 -
밥 먹는 풍경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8.28 17:26:19안주철(1975~)둥그렇게 어둠을 밀어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 원일 때 차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가락일 때 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 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 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 유성처럼 흘러내릴 때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와냉장고 문을 열고 열반에 들 때 가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진열대와 엄마의 경제가 흔들릴 때 가게 평상에서 사내 -
연어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8.07 17:13:32딸아이처럼 앳돼 보이는 햄버거 집 알바생래퍼처럼 경쾌하게 주문을 받고달인처럼 손가락을 움직인다틈틈이 테이블을 닦는 손걸레질도제집 밥상 닦듯 야무지다요리 뛰고 조리 뛰면서도 말갛게 웃는 얼굴그 아이를 보며햄버거 패티와 도살된 소, 환경파괴 최저임금 신자유주의를 운운하기 난처하다흐르는 강물이 더러워도강줄기를 비틀거나 방향을 바꾸지 않고저 혼자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저 즐겁고 씩씩한 한 마리 말간 연어고 -
아득한 성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7.31 17:11:58- 조오현(1932~2018)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뜨는 해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하루 동안 세상 모든 걸 다 보았다니 과찬이십니다. 단지 짧은 생이 상찬의 대상이라면 천 년 사는 학은 얼마나 몸 둘 바 없겠습니까? 저희도 하루 -
배가 고파요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7.24 17:32:57박소란(1981~) 삼양동 시절 내내 삼계탕집 인부로 지낸 어머니아궁이 불길처럼 뜨겁던 어느 여름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까무룩 꺼져가는 숨을 가누며 남긴 마지막 말 얘야 뚝배기가, 뚝배기가 너무 무겁구나그 후로 종종 아무 삼계탕집에 앉아 끼니를 맞을 때 펄펄한 뚝배기 안을 들여다볼 때면 오오 어머니 거기서 무얼 하세요 도대체자그마한 몸에 웬 얄궂은 것들을 그리도 가득 싣고서 눈빛도 표정도 없이 아무런 소식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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