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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천재 동성애 범법자에서 영국 최고액권의 등장인물로…'앨런 튜링'의 재평가

4차산업의 아버지 '엘런튜링' 영국 화폐의 얼굴이 되다

영국중앙은행, 50파운드 화폐 초상인물로 '앨런 튜링' 선정

…80여년 만에 재평가

2차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암호기계 '애니그마' 파쇄의 장본인

뛰어난 암호학자이자 컴퓨터공학자로 블록체인,AI 분야서 현재까지 언급

비밀로 부쳐졌던 2차 대전시 활동 내역 2013년에야 세상에 공개돼

앨런 튜링의 생애를 그린 2014년 작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한 장면.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자신만의 세계를 사는 앨런 튜링 역을 맡아 열연했다./사진=네이버 영화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암호장치 애니그마(Enigma)는 영국군에게 골치거리였다. 애니그마는 타자기 같은 자판에 글자를 치면 안의 회전틀과 배선의 조정을 통해 전혀 엉뚱한 글자를 출력해주는 암호기계였다. 애니그마의 출력 규칙은 수시로 바뀌었고, 이를 통해 만들 수 있는 암호조합은 2,200만개에 달했다. 애니그매의 회전체가 2개에서 5개로 늘면서 단어 조합의 수가 159억개에 달했다는 설명도 있다. 이 조합을 10명이 달라붙어 수작업으로 확인한다면 2,000만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당시 기술로 애니그마는 해독 불가능한 암호 체계로 받아들여졌다.

독일군은 애니그마로 만든 암호문을 이용해 적을 공격할 시점과 방법, 구체적인 대상 같은 중요 정보를 주고 받고 있었다. 암호문을 입수하더라도 해독할 길이 없는 연합군은 독일군의 기습에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영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영국군은 1939년 선전포고와 동시에 런던 북부 지방인 블레츨리 파크에 암호해독반을 꾸리기 시작했다.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인물은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 그는 학창시절 미적분을 배우기도 전에 미분적분 문제를 풀고, 아인슈타인의 책을 읽다가 혼자 아인슈타인의 운동 이론을 깨우쳤다는 뒷얘기가 남아있는 비범한 학자였다.

튜링은 동성애자이기도 했고, 군에 소속돼 일하면서도 권위와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괴짜기도 했다. 말을 더듬는 습관도 있었으며 글쓰기에도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도 전해진다. 확실한 것은 그가 수학이라는 한 분야에서는 영국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점이다.

튜링의 관심분야는 연산 능력을 갖춘 기계의 개발이었다. 영국군이 그에게 기대한 역할도 애니그마의 알고리즘을 파악해 이를 해독할 수 있는 대항 기계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암호해독병이 수작업으로 애니그마를 파쇄할 수 없다는 것 쯤은 이미 영국군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앨런 튜링의 실제 얼굴. 그는 2차세계 대전 당시 영국 정부에서 독일의 암호기계 ‘애니그마’를 파쇄하는 임무를 받았다./사진=위키피디아


튜링을 중심으로 암호해독반의 규모는 1만여명까지 늘었다. 블레츨리 파크에서는 애니그마를 파쇄하기 위해 새벽 6시부터 자정까지 독일군의 전보를 입수하는 정보전이 진행됐으며 동시에 당대 영국의 천재들이 함께 티끌 같은 단서들을 긁어모아 온갖 상상력과 논리력, 사고력을 총동원하는 암호학의 향연이 펼쳐졌다.

애니그마는 한 타자당 한 철자만 변환돼 나오는 특성이 있었다. 이에 암호문의 길이는 정확히 입력된 평문의 타자수와 일치했다. 이는 영국군에게 단어나 문장을 유추하는데 도움이 됐다. 매일 같은 시각 같은 내용으로 전달되는 날씨 정보, 히틀러의 이름 등도 에니그마의 회전체 설정변경을 해독하는 단서가 됐다.

튜링은 이같은 몇가지 애니그마의 작동방식, 특징, 애니그마 규칙 변경 주기 등을 활용해 암호해독 기계 개발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애초 엄두도 나지 않던 암호문 해독 시간은 차츰 줄어들어 나중에는 1시간까지 줄였다. 당시의 정보통신 수준을 고려하면 사실상 실시간 해독이었다. 튜링은 급기야 독일의 공격계획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암호문을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독일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무시할 공격과 대응할 공격을 일부러 나누기도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앨런 튜링이 해독에 나선지 4년 후인 1943년 영국군은 자국 군함의 피해가 거의 없이 독일의 잠수함을 대거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로 영국은 대서양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암호 경쟁에서의 승리가 전투의 승리로, 결국은 전쟁의 승리로 이어진 순간이었다. 앨런 튜링은 세계 2차대전에서 영국군을 승리로 이끈 한 명의 전쟁 영웅이다.

그는 아울러 텍스트를 암호화하고 해독하는 초기 암호학의 기틀을 닦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암호학의 관점에서 세계 2차대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희생을 담보로 암호학이 급속도로 발전한 계기였다.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암호학이 군사 분야에서 민간의 영역으로 넘어오기 전까지 암호를 만들고(암호화) 푸는(복호화) 기법과 암호학 논리가 급성장한 시기가 바로 2차 세계 대전이었다. 엄혹한 전쟁의 한 복판에서 암호학의 급성장을 이끌었던 이가 바로 앨런 튜링이다.

앨런튜링이 2차세계 대전 당시 고안해 브리츨리파크에서 실제 쓰였던 튜링머신. 정식 이름은 ‘튜링 봄베(turing Bombe)’다./사진=geograph.org.uk


특히 암호학은 블록체인의 근간이다. 비트코인은 은행과 같은 중앙 기관이 없이 누구나 익명으로 화폐를 발행하고 거래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다 태어난 기술이다. 이를 구현하는데는 컴퓨터 공학과 수학, 암호학이 쓰였다. 암호화폐 백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앨리스(Alice)와 밥(Bob)이라는 이름도 암호학 용어다. 각각 송신자와 수신자를 뜻한다.

그는 뛰어난 암호학자인 동시에 컴퓨터의 시조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앨런 튜링은 본래의 위치인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로 돌아가 연산 기계 연구에 헌신했다. 그가 고안한 기계는 튜링머신이라고 불린다. 원리는 이렇다.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연산이라도 이를 단위별로 잘게 쪼개면 결국 단순 연산의 연속이 된다. 결국 단순한 연산을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복잡해 보이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셈이다. 튜링은 이를 이용하면 연산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사고 능력, 행위능력을 재현할 수 있는 기계가 탄생할 수 있다고 봤다.

현대 AI 분야에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 기계와 대화하게 한 후 내 대화상대가 기계임을 눈치채는 경우가 70%에 미치지 못하면 이 기계는 지능을 가졌다고 보는 테스트가 있다. 이름은 튜링 테스트다. 물론 앨런 튜링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가 제안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튜링 머신이 실제 그 구상대로 작동한다면 이를 튜링 완전성이라고 부른다. 튜링완전성은 복잡한 행위를 잘게 쪼개, 각 명령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결과물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커피를 마시는 행위를 쪼개 보자. 커피를 보고, 손을 뻗고, 커피잔을 쥐는 등 일련의 행동으로 나눌 수 있다. 커피를 보는 행위, 손을 뻗는 행위 등 각 단계는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카피를 마시는 행위 뿐 아니라 다른 행동으로도 구성할 수 있다. ‘커피를 쥔다’/ ‘손을 뻗는다’ 순으로 조합하면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얼굴에 커피를 뿌리는 행위로 만들 수도 있다.



만약 어떤 기계가 ‘커피를 마신다’라는 명령어만 인식할 수 있다면 이 기계의 기능은 커피를 마시는 행위로 한정되겠지만, 만약 행위를 잘게 쪼개 인식하고 재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면 커피를 만들거나, 뿌리는 등의 기능이 가능하다. 커피를 마실 수만 있는 기계보다, 뿌릴 수도 있는 기계가 더 튜링완전한 기계다. 이에 녹음기나, 내비게이션 등 단일한 기능만을 구현하는 장치보다 모든 기능을 한번에 구현하는 스마트폰이 튜링 완전한 기기다. 스마트폰 보다는 인공지능을 갖춘 휴머노이드 로봇이 더 튜링완전한 기계일 것이다.

튜링 머신의 개념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튜링완전언어라고 부른다. 이더리움 블록체인이 비트코인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이야기하는 ‘튜링완전성’과 튜링완전언어가 바로 앨런 튜링의 이름에서 따온 개념이다.

비트코인에서 쓰는 언어인 스크립트(Script)는 비트코인을 보내고 받는 제한된 형태의 명령만이 가능하다. 이더리움 개발자 비탈릭 부테린은 솔리디티(Solidity)라는 보다 튜링완전한 언어를 사용해 블록체인 위에서 암호화폐를 주고 받는 것은 물론 여러 기능을 구현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 할 수 있도록 했다. 윤석구 소버린월렛 네트워크 대표는 “비트코인이 블록체인 위에서 금전가치를 주고 받는 프로토콜(체계)이라면 이더리움은 블록체인 위에서 프로그램까지 주고 받을 수 있는 프로토콜”이라고 설명한다.

초기 비트코인 커뮤니티의 열정적인 참가자였던 비탈릭 뷰테린은 비트코인 시스템에 튜링완전언어를 접목한다면 블록체인 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애초 이 아이디어는 비트코인 개선 아이디어(BIP) 형태로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는 따로 이를 구현했다. 그렇게 2014년 이더리움이 탄생했다.

이에 앨런튜링의 연구는 암호학의 기반을 다지고, 컴퓨터 공학의 출발선이었으며 비트코인 이후 블록체인의 확장에 영향을 미쳤다. AI에서까지 그의 이름이 거론되니 이쯤 되면 ‘컴퓨터의 아버지’를 넘어 4차 산업의 아버지라는 칭호도 과장만은 아니다.

장작 그의 마지막은 불행했다. 튜링의 남성 잠자리 파트너가 튜링의 집을 털려 난동을 부린 사건이 발단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동성애 성향이 영국 수사당국에 적발됐다. 문제는 당시 영국에서는 동성애가 불법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감옥에 가는 대신 화학적 거세 형을 선택해 1년간 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후 그는 스스로 독을 넣은 사과를 먹고 숨을 거뒀다. 백설공주의 방식이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세상은 내게 여자가 되기를 바라므로, 나는 가장 여성스러운 방법으로 숨을 거둔다”고 적혀있었다. 한 때 애플의 한 입 베어먹은 사과 로고 디자인이 앨런 튜링을 기리는 디자인이라는 루머도 돌았다. 이는 스티브 잡스의 공식 부인으로 뜬 소문으로 일단락 됐지만, 이같은 루머가 나오는 것도 어찌보면 튜링이 남긴 족적의 크기를 방증한다.

브레츨리 파크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비밀로 부치기로 한 영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그의 전쟁 업적마저 영원히 묻힐 뻔 했다. 지난 201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튜링을 특별 사면하면서 괴짜 수학천재 동성애자로 남을 뻔 했던 그의 삶은 암호학으로 영국을 구한 영웅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2014년에는 앨런 튜링의 삶을 담은 영화가 만들지기도 했다. ‘셜록’으로 유명한 영국의 배우 배네딕트 컴버배치가 고지식하고 규율에 관심이 없으며 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천재 암호학자를 연기했다.

영국의 화폐 50파운드 화폐권에 초상인물로 인쇄된 앨런 튜링의 얼굴.


그리고 2019년 7월 15일(현지시간) 마크 카니 영국중앙은행(BOE) 총재는 맨체스터 과학산업박물관에서 열린 행사에서 영국내 최고액권인 50파운드(약 7만4,000원) 지폐 뒷면 초상인물로 튜링이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한 나라의 최고액권에 등장하는 인물의 의미는 그 나라의 정체성 그 자체일 것이다.

카니 총재는 “튜링은 탁월한 수학자로 오늘날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며 “컴퓨터·수학자, 인공지능(AI)의 아버지로, 또 전쟁 영웅으로 광범위하면서 선구자적인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그가 살던 시대에 그는 범법자였지만, 2019년 그는 영국의 영웅이 됐다. 만약 그의 연구를 토대로 한 4차산업혁명이 인류에 영화를 가져다 준다면, 미래에 이르러 그는 영국을 넘어 인류의 영웅 중 한 명으로 평가 받지 않을까.

/김흥록기자 ro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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