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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WITH] 지폐 속 과학자

지폐 속에는 한 국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폐에 그려진 인물과 동물, 유적지, 상징물들의 면면은 그 나라를 이해할 최고의 역사 교과서다. 이는 과학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지폐 속에 등장하는 과학자와 과학기기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좁게는 한 국가, 넓게는 인류의 과학 역사를 알 수 있다.


김청한 기자 best@hmgp.co.kr

보통 지폐 속에 들어가는 인물 은 나라를 위해 큰 업적을 쌓았거나 전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사 람들 중 선정된다. 그렇기에 지폐를 잘 살펴보면 각 국가와 대륙에서 특정 직군의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과학자가 가장 대우를 많이 받는 지역은 유럽이다.

2004년 ‘새 지폐에 우리 과학자 얼굴 모시기 운동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서명운동을 펼치기도 했던 연세대 의대 정태섭 교수에 따르면 유로화 이전 유럽 18개국 지폐 107종 중 과학자가 등장한 지폐는 전체의 24%인 26 종에 이른다. 이 같은 유럽에서의 과학자 우대(?)는 근대 과학의 태동이 유럽에서 시작됐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근대 과학의 태동지 유럽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과학자가 지폐 속에 등장한다.

하지만 조사대상을 전 세계의 지폐로 넓힌다면 안타깝게도 과학자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2004년 일본의 문학자 나카노 교코의 저서 ‘지폐는 말한다’를 보면 당시 전 세계에서 통용됐던 1,000여종의 지폐에서 저명 인물은 모두 421명으로 집계됐다. 이중 가장 많은 모델이 된 것은 문화 예술인으로 162명이었으며 그 뒤를 117명의 정치인이 따랐다. 반면 과학자는 전체 인물 중 7%에 불과한 30명에 머물렀다. 7년 전의 조사 결과라고는 해도 과학기술계 인사들이 자부심을 갖기에는 결코 충분치 않은 숫자다.

또한 지폐에 모습을 드러낸 과학자는 아인슈타인, 뉴턴 등 사실상 위인 수준의 위치를 점하는 인물들이 상당수였으며 그나마도 저가의 지폐에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가 이내 사라진 경우가 많다. 일례로 아인슈타인을 주인공으로 1968년부터 발행됐던 이스라엘의 5리로트 지폐는 1984 년 발행이 중단됐다. 근대 물리학의 뼈대를 세운 뉴턴 역시 1978년 영국 1파운드 지폐에 등장했지만 고작 5년만인 1982년 사라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각국의 과학자들은 국민의 지지를 얻으며 꾸준히 지폐를 장식하고 있다. 노르웨이 200크론 지폐에는 물리학자이자 화학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티안 비르켈란(Kristian Birkeland)이, 이라크의 1만 디나르 지폐에는 아랍의 과학자 이븐 알 하이삼(Abu Ali al-Hasan Ibn al- Haitham)이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퀴리 부부나 갈릴레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과학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해당 국가에서는 큰 의미가 있는 과학자들이다. 실제로 크리스티안 비르켈란은 노르웨이의 상징이자 가장 아름다운 자연 현상의 하나로 꼽히는 오로라의 비밀을 밝혀낸 학자다. 물리·천문·수학·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큰 업적을 남긴 이븐 알 하이삼은 인간 눈의 작동원리를 밝혀내고 안경의 기원인 둥근 유리 확대경을 발명해 근대 광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 과학자가 지폐에 들어갈 날을 기원하며, 파퓰러사이언스는 앞으로 세계 각국 지폐 속 과학자를 찾는 여정을 떠난다. 아인슈타인, 뉴턴 등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들을 최대한 배제하고, 각 나라의 과학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과학자를 위주로 소개할 예정이다.








대한민국 지폐, 과학기술 대세는 ‘천문학’






우리나라 지폐에는 과학자가 들어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과학자는 아니지만 과학의 진흥에 혁혁한 업적을 세운 세종대왕이 1965년 100원권에 처음 등장한 이래 지금의 1만원권에 이르기까지 장수모델로 위용을 과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물에서 벗어나 시각을 문화재와 과학기기로까지 넓힌다면 과학기술과 연관된 물품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특히 현재 발행되고 있는 1만원권 뒷면에는 보현산 천문대 망원경과 혼천의(渾天儀),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있어 대한민국 천문학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2-13호인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구, 보물 제837호인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이렇게 측정된 별자리를 기록한 지도다.

직경 1.8m의 보현산 천문대 망원경은 국내 최대 망원경으로 유명하다.

1만원은 이외에도 우리나라 지폐 중 가장 과학과 관련이 깊다. 1973년 첫 발행에서부터 세종대왕이 줄곧 모델로 나왔으며 1979년부터는 측우기도 등장했다. 현행 1만원권이 발행되기 전인 2007년 1월 22일까지 줄곧 세종대왕의 옆자리를 지킨 측우기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과학 문화재의 하나다.

1962년 발행된 10원권에는 인물 없이 과학 관련 문화재로 앞뒷면이 채워져 있다. 앞면에는 한국 천문학의 상징과도 같은 첨성대가, 뒷면에는 임진왜란에서 활약하던 거북선이 있다. 거북선은 1966년과 1973년 발행된 500원권에도 등장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지폐 속 과학의 모습은 그 비중이 적지 않지만 천문학에 주로 치중돼 있다. 화학, 물리학 등 다양한 과학의 모습을 우리나라 지폐 속에서 찾는 것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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