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언더 아머의 본격 승부

UNDER ARMOUR GETS SERIOUS

케빈 플랭크 KEVIN PLANK가 꿈일 것만 같았던 언더 아머를 10억 달러 규모 사업체로 키운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볼티모어 브랜드 언더 아머의 앞날은 어떻게 전개될지 포춘이 살펴봤다.

"나 원 참, 말들이 어찌나 많은지.” 케빈 플랭크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9월 15일 볼티모어의 언더 아머 본사. 홀로 연단에 선 그 앞에는 직원 1,000명이 늘어선 농구코트가 펼쳐져 있다. 언더 아머 CEO 겸 창립자인 플랭크 몇 달에 한 번씩 개최하는 직원 모임 Townhall Meeting이다. 플랭크가 소리친다.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분명히 말하는데, 우리 회사 절대 매각 안 합니다!” 직원들의 환호성이 터진다.

올해 39세인 플랭크는 밝은색 폴로 티셔츠에 눈에 띄게 현란한 운동화 차림을 하고 있다. 당연히 둘 다 언더 아머 제품이다. 그가 직원들 앞에서 한 말은 몇 달마다 한 번씩 갑자기 튀어나오는 소문에서 비롯됐다. 이번 타운홀 미팅 바로 전날에도 매출액 210억 달러 기업 나이키가 대학 벤처기업으로 시작해 매출 14억 달러 규모로 성장하며 오리건 주 비버튼 Beaverton의 대기업 나이키를 위협하는 경쟁 상대로 떠오른 언더 아머를 인수하리라는 소문이 밤새도록 트위터 타임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다.

직원들 앞에 선 플랭크는 아버지와 군대 훈련교관의 중간쯤 될 듯한 목소리 톤으로 경쟁심을 자극하는 구호를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나이키를 언급한 후 그는 또 다른 응원의 메시지를 덧붙였다.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정합니다. 우리 회사가 무엇을 할지는 바로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사실상 ‘나’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플랭크는 회사 지분의 22%, 투표권의 74%를 보유하고 있다. 직원 모임이 끝난 후 플랭크가 한 방문객에게 말한 내용은 연단에서 한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회사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수준보다 더 높은 금액의 인수 제안을 받았다면 아무래도 팔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플랭크에겐 지금껏 다른 이들은 감히 꿈조차 꾸지 못하는 머나먼 은하계 저 편 세상까지도 항상 ‘다다를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현재 언더 아머는 군소 업체가 난립하는 미국 스포츠의류 시장에서 나이키 시장점유율의 절반에 가까운 3%를 기록하고 있다. 셔츠, 반바지, 미끄럼 방지 밑창에서부터 속옷에 이르기까지 모든 품목을 취급한다. 100개가 넘는 대학에 유니폼도 공급하고 있다. 언더 아머 주가는 6년만에 3배로 올라 현재 주당 74.64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플랭크가 보유한 지분 가치도 9억 달러에 달한다. 알파벳 U와 A를 서로 맞물린 언더 아머 로고는 이제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 모양을 형상화한 나이키 로고 스우시 swoosh *역주: 한국어 ‘휙’에 해당하는 의성어로 나이키 로고의 애칭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이미지가 됐다.

언더 아머 전에도 업계를 뒤흔든 신생 브랜드는 있었다. 그렇지만 플랭크는 입어도 덥지 않은 셔츠와 운동선수의 승부 근성 딱 두 가지만 가지고 사업을 시작해 사업 원천이 훨씬 풍부한 지배적 기업을 상대로 괄목할 만한 승부를 벌였고, 경기 불황 속에서도 꾸준히 시장점유율을 늘렸다. 이것이 언더 아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포춘의 ‘40세 이하 영향력 있는 인물 40인’ 순위에 오를 수 있는 마지막 해인 올해 그는 역대 최고 순위인 12위를 차지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살펴본다.

언더 아머의 창립을 둘러싼 이야기는 기업가 정신을 주제로 한 고전적 동화다. 플랭크는 메릴랜드 대학 미식축구부 연습팀의 2군 선수였다. 1995년 어느 날, 연습 후 땀에 흠뻑 젖은 티셔츠를 갈아입는 일에 진절머리가 난 그는 수분을 흡수해 몸을 시원하게 유지할 수 있는 폴리에스테르 혼방 티셔츠를 떠올렸다. ‘고성능 의류 performance apparel’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플랭크가 아니었지만,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대중을 대상으로 한 고성능 의류 시장의 가능성을 처음 알아본 이는 바로 그였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플랭크는 푸르덴셜 생명보험에서 취직 제의를 받았지만 안전한 길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런 길을 택했다면 아마 자살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5형제 중 막내로 자란 그는 경쟁심과 승부 근성으로 꽉찬 사람이었다. 하지만 플랭크가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이 된것은 메릴랜드 주의 작은 도시 켄싱턴 Kensington의 시장인 어머니 밑에서 컸기 때문인 듯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는 학업성적 부진으로 조지타운 예비학교 Georgetown Prep School에서 쫓겨났고, 결국 포크 유니언 Fork Union 군사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철도 들고 축구도 시작했다.

사업과 관련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지만 플랭크는 티셔츠 장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가진 무기는 딱 하나, 운동선수들과의 인맥뿐이었다. “(회사가) 어떻게 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매일 아침 일어날 때 실패하리라는 생각을 결코 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여섯 사람만 거치면 세상 모두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6단계 분리 이론’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지만, 플랭크는 이 이론의 한계에 도전했다. 고등학교, 군사학교, 메릴랜드 대학인맥을 통틀어 그가 전화를 걸어 티셔츠를 나눠 줄 만큼 친분이 있는 NFL 선수가 적어도 40명은 넘었다. 하지만 플랭크는 전화통만 붙들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티셔츠를 가득 실은 트렁크를 끌고 길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학교와 훈련캠프를 찾아 다니며 상품 홍보를 했고, 길가에 세워 놓은 차안에서 잠깐씩 눈을 붙이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킵 펄크스 Kip Fulks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은 언더 아머 최고운영책임자(COO)가 된 펄크스는 메릴랜드 대학 라크로스 선수로, 플랭크와는 친구를 통해 아는 사이였다. 플랭크는 미식축구 선수들에게 했던 대로 라크로스 선수들에게도 똑같이 홍보해 달라고 펄크스에게 요청했다. 펄크스는 “당시 케빈의 아이디어는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지만, 브랜드 이미지나 로고 같은 것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자금사정도 준비되어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1998년 들어서야 플랭크와 펄크스는 워싱턴의 소규모 애덤스 은행 Adams Bank 직원 케이트 카 Kate Carr로부터 중소기업 대출 25만 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후에도 조금씩 대출을 더해 주었다. “케이트는 한 번에 충분히 많이 주는 법은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선 엄마 같았죠.” 펄크스는 웃으며 말했다. 또 다른 도움의 손길은 플랭크의 형 스캇으로부터 왔다. 당시 사업자금을 빌려준 스캇 플랭크는 지금도 회사 지분의 4%를 보유하고 있다. 마지막 자금 줄은 신용카드였다. 펄크스를 처음 만나자마자 플랭크가 물었던 것도 신용한도가 얼마나 되는가였다. “우리 둘이 카드를 17개 정도 썼는데, 전부 제 카드였습니다. 연체는 단 1달러도 한 적이 없어요.” 펄크스는 말한다.

그래도 아직은 어중이떠중이 상태였다. 조지타운에 자리잡은 플랭크 할머니의 연립주택 지하 공간과 사업을 시작하려고 마음먹은 운동광 세 명이 언더 아머의 전부였다(삼각편대의 마지막 일원은 플랭크의 고등학교 친구인 라이언 우드 Ryan Wood였다. 그는 목장을 운영하겠다며 2007년 퇴사했다). 그것도 다른 사업도 아닌 스포츠 의류사업이었다. 코카콜라의 경쟁 업체를 창업한다거나 이제 와서 제2의 페이스북을 만들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펄크스도 이를 인정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죠. 말로야 좋‘ 았어, 나이키와 맞장 한번 떠보자고!’ 했지만 가진 건 골판지 상자에 담긴 티셔츠가 전부였고, 그나마도 바닥에 곰팡이가 피고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그땐 무모한 줄 몰랐고, 그저 황홀하기만 했습니다.” 외부 약속이 잡히면 이들은 항상 “사무실이 리모델링공사 중”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워싱턴 DC의 클라이드 Clyde’s 라는 술집 구석방을 약속장소로 정했다.

언더 아머는 6단계 지인 네트워크 전략에 힘입어 급속도로 추진력을 얻기 시작했다. 1996년 플랭크는 애틀랜타 팰컨스 Atlanta Falcons 선수 몇 명에게 언더 아머 티셔츠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플로리다 주립대 라커룸에서 언더 아머 옷을 본 팰컨스 의류장비 담당자가 주문을 한 것이다. 이때부터 플랭크는 개별 선수보단 구단 의류장비 담당자들에게 주로 전화를 걸게 되었다. 한 장에 25달러 하는 티셔츠가 물론 비싸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일반적인 면 티셔츠보다 더 오래 입을 수 있다고 담당자들을 설득하는 일이 그의 과제였다.

단체 운동복 사업과 학교 운동부와의 거래를 통해 사업을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언더 아머의 첫 번째 대박은 2000년에 터졌다. 나중에 딕스 스포팅 굿 Dick’s Sporting Goods에 인수된 대형 소매업체 갤리언 Galyan과 계약을 맺은 것이다. 다른 업체도 뒤를 이었다. 지금도 언더 아머 매출의 30% 정도가 딕스스포팅 굿과 스포츠 어소리티 Sport Authority로부터 나온다.

선수 개인을 신격화하는 나이키와는 달리, 언더 아머의 브랜드 정체성은 처음부터 항상 팀이었다. 셔츠에서 모자, 양말과 같은 액세서리까지 사업 영역을 종횡무진 넓힌 언더 아머는 2004년 플랭크의 홈팀인 메릴랜드 대학 미식축구부의 공식 유니폼 공급업체가 되었고, 2008년에는 메릴랜드 대학 모든 운동부의 유니폼은 물론 학내 매점에서 판매되는 의류 전체를 담당하게 되었다. 현재 언더 아머는 대학축구 상부 리그인 디비전 1 소속대학 중 어번 Auburn 대학교와 보스턴 칼리지 등 10개 학교와 전속 계약을 맺고 있다. 대학 유니폼 사업은 큰돈이 되지는 않지만 브랜드 노출 효과가 크다. 특히 어번의 캠 뉴튼 Cam Newton처럼 빅스타 선수가 있는 학교라면 더욱 그렇다. 캠 뉴튼은 졸업 후 프로에 진출하고 나서도 언더 아머 제품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 1월, 나이키의 간판 대학인 오리건 주립대와 어번 대학이 대학 미식축구 최고봉을 가리는 BCS 내셔널 챔피언십에서 맞붙었다. 이 시합에는 언더 아머 대 나이키의 승부라는 별명이 붙었다. 참고로 승리는 어번의 몫으로 돌아갔다. 언더 아머가 더 이상 변두리 선수가 아닌, 스포츠 업계의 스타가 된 것이다.

1998년 무렵 언더 아머는 플랭크의 할머니 댁에서 나와 볼티모어의 샤프 스트리트 Sharp Street로 자리를 옮겼다. 퍽퍽한 도시 분위기는 메릴랜드에 뿌리를 둔 언더 아머와 무척 잘 어울렸다. 의류부문 수석부사장 헨리 스태포드 Henry Stafford는 보스턴을 일컬어 “일벌레들의 투지가 느껴지는 도시”라며 “보스턴이라는 도시의 DNA가 언더 아머의 성장에 한 몫을 했다”고 말한다. 처음으로 언더 아머만의 사옥, 말 그대로 홈코트를 만들게 되었을 때도 이들은 스몰티모어Smalltimore라는 애칭을 지닌 이 작은 도시를 택했다. 2002년 언더 아머는 40만 제곱피트 규모의 타이드 포인트 콤플렉스 Tide Point Complex에 새 둥지를 틀었다. 예전에는 프록터 앤 갬블(P&G)의 세제 공장으로도 쓰였던 이 사옥은 치어 앤 조이 Cheer & Joy라는 건물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스포츠 의류업체와 퍽 어울리는 이름이다.

한 직원은 “여기서 일하다 보면 꼭 스포츠 팀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라고 말한다

현재 볼티모어 본사는 언더 아머가 2003년 첫 TV 광고에서 보여 준 이미지를 만화처럼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광고 속에서 플랭크의 메릴랜드 대학 시절 팀 동료선수와 NFL 댈러스카우보이스 선수들은 에릭 오그보구 EricOgbogu *역주: 댈러스카우보이스 소속 선수로 현재 언더 아머 모델에게 태클을 걸며 “홈에선 질 수 없어 We must protect this house!”라고 소리를 질렀다. 볼티모어 본사에 가 보면 근육질 남녀 직원들이 마치 광고를 재연이라도 하려는 듯 주차장에서 운동을 하고, 굵은 로프를 들고 스트레칭을 하거나 콘크리트 길을 따라 웨이트 트레이닝용 추를 잔뜩 실은 트롤리를 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택시가 나타나자 한 혈기왕성한 직원이 옆으로 뛰어간다. 그러곤 몸을 굽히고 무게 추를 잔뜩 집어 트롤리에 더 얹으면서, 헐떡이며 기사에게 고함을 친다. “길 막아줘서 고맙소, 기사 양반!”

안이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한 넓은 사무실에 플랭크가 앉아 있다. 여전히 운동선수 같은 모습이다. “직원들이 다들 젊고 멋지죠? 학교에서도 아주 잘나가는 친구들이었습니다.” 동창회에서 만취한 사람처럼 그는 거리낌 없이 직원들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는 정장과 넥타이의 불편함에 격분하고 비행기의 전신 안락의자는 건강에 해로우니 더는 만들지도 타지도 말아야 한다며 몸매 관리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플랭크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언더 아머를 건강과 연결짓고 싶기 때문이다. 언더 아머 직원 카페테리아에는 메뉴별로 색깔 암호가 있다. 녹색 음식은 “파이팅!”이라는 뜻이고, 햄버거나 감자튀김 같은 빨간색 음식은 “워, 워!”라는 뜻이다. 직원들은 본사 건물을 ‘캠퍼스’, 동료 직원들을 ‘팀 동료’라고 부른다. 에린 웬델 Erin Wendell이라는 직원은 “여기서 일하다 보면 꼭 스포츠 팀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라고 말한다.

스포츠 팀으로 치면 언더 아머는 리그 규정을 자주 묵살하는 팀이다. 2005년 주식시장 상장을 준비할 때 플랭크는 골드만 삭스 직원들과 만났다. 당시 CFO였던 웨인 마리노 Wayne Marino는 골드만 삭스 측에서 플랭크에게 전했던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과장된 광고보단 확실한 숫자를 좋아하니 기업 순회 설명회에 제품이나 비디오는 전혀 가져올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자마자 플랭크는 직원들에게 “여러분, 우리 끝내주는 비디오 하나 만듭시다”라고 말했다. 비디오 전략은 통했다. 상장 첫날부터 주가가 94% 뛰었다.

뛰어난 감각을 지닌 플랭크는 주목받을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물론 그 주목이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9월 메릴랜드 미식축구 팀은 새 언더 아머 유니폼을 선보였다. 이번 시즌에 입을 32가지 조합 중 첫 조합을 선보인 메릴랜드 팀 선수들은 헬멧과 양 어깨에 메릴랜드 주 깃발이 커다랗게 붙어 있어 꼭 체스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새 유니폼은 열띤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나이키 포스터 모델 레브론 제임스 LeBron James는 트위터에 “말도 안 돼, 이번 메릴랜드 유니폼 정말 쓰레기잖아!”라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웹사이트 데드스핀닷컴 Deadspin.com은 한 포스팅 헤드라인을 통해 “메릴랜드 선수들은 언더 아머에서 제공만 하면 광대 옷이라도 입을 것”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플랭크는 직원 모임에서 “우리 회사가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는 뜻”이라며 오히려 도전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는 나이키 같은 거대조직을 상대하려면 더 화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포츠업계 거물 나이키는 언더 아머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다. 스포팅 굿 인텔리전스 Sporting Goods Intelligence(SGI)의 자료에 따르면, 나이키의 미국 스포츠의류 시장 점유율은 7%가량이다. 언더 아머는 3%에 조금 못 미친다. 하지만 나이키의 전략이 자신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능숙하게 떠벌리는 언더 아머 임원들의 말만 듣다 보면 이 사실을 눈치채기 힘들다. “17살짜리 아이한테 나이키가 형편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나이키가 형편없지 않은 게 사실이니까요. 나이키는 대단한 기업이고, 그 17살짜리 아이는 나이키 브랜드와 아주 좋은 관계입니다.” 플랭크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키와 언더 아머 의류사업부에서 모두 일해 본 애덤베이커 Adam Baker는 골리앗 나이키도 언더 아머의 잠재력을 잘 알고 있으며, 심지어 베이커가 나이키에 있던 2003년엔 언더 아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전담 직원까지 따로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나이키 측은 현재 그런 직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이키를 버리고 언더 아머를 택한 베이커의 결정을 두고 사람들은 그가 음지로 가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언더 아머가 세계 무대에서 나이키의 영향력을 따라잡자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매출의 60% 이상이 해외에서 나오는 나이키와 달리 언더 아머는 해외 매출 비중이 6%에 불과하다. 일본에선 제법 성공했지만 중국, 브라질, 인도 같은 신흥시장에선 거의 존재감이 없다. 2006년에 시작한 신발 사업의 경우, 언더 아머 전체 매출의 12%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SGI에 따르면 총 규모가 14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전체 스포츠용 풋웨어 시장에서 언더 아머가 차지하는 파이는 고작 1%에 불과하다. 반면 나이키의 시장점유율은 42%가 넘고 아디다스 그룹은 11%를 차지하고 있다.

플랭크가 지금까지 실패한 일은 신발도 의류만큼 주목을 끌도록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지난 3월 뉴욕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PSAL 청소년 농구경기에서는 참가한 두 팀이 모두 언더 아머의 신제품 스슈즈 Hoops Shoes를 착용했다. 플랭크는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으러 라커룸에 들어간 선수들이 나이키 조단 Jordan으로 갈아 신고 나오더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우리도 그 자리에 오를 테니까요.” 스포츠 원 소스 Sports One Source의 스니커즈 전문가 매트 파월 Matt Powell은 플랭크의 말을 믿는다. 파월은 “스니커즈 신제품을 보고 언더 아머가 드디어 영향력과 심미안을 갖춘 기업이 되었다고 느꼈다”며 9월 언더 아머의 신발 매출이 전년 대비 27% 증가했다고 귀띔했다.

여성의류는 또 하나의 도전 분야였다. 언더 아머는 2004년부터 여성의류를 취급하고 있지만, 비중은 전체 의류 매출의 25%에 그치고 있다. 경쟁도 치열하다. 특히 룰루레몬 애슬레티카 Lululemon Athletica 같은 신흥 여성 스포츠의류 브랜드의 맹공이 위협적이다. 언더 아머는 2009년 메릴랜드를 졸업하고 지금 프로비던스에서 스포츠 리포터로 활약 중인 코트니 팰론 Courtney Fallon 같은 젊고 활동적인 여성들을 공략해야 할 듯하다. 팰론은 “언더 아머의 대학 내 영향력이 엄청났고 재학 중일 땐 자신에게도 매력적인 브랜드였지만, 지금 내 옷장은 룰루레몬 옷으로 꽉 차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언더 아머가 여성 소비자 대상 마케팅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회사 구성 자체가 남자 선수들 클럽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더 아머의 이사회나 고위급 임원진에는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다. 반면 나이키는 이사진 중 두명, 최고위 임원 중 두 명이 여성이다. 지난 9월 COO로 내려온 마리노도 그 문제를 인정하지만, 나름대로 변명도 하고있다. “알고 보면 우리 이사회는 아주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변호사도 있고, 소프트웨어 기업 CEO도 있고…” 만약 변호사와 컴퓨터 괴짜가 마케팅 타깃이라면 훌륭한 얘기겠지만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플랭크의 사무실 칠판에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몇몇 경구가 적혀 있다. 그중 하나는 이렇다. “최고의 장사꾼은 바람을 예측하는 자가 아니라 좌우하는 자이다.” 이것이 언더 아머의 도전과제다. 언더 아머는 타이트한 압박 의류 시장에 혁명을 일으켰지만, 이젠 누구나 압박의류를 판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언더 아머 제품 디자인실 문 위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우리는 아직 우리를 정의하는 상품을 만들지 못했다.”

플랭크는 아직 언더 아머가 젊은 회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창업 16년이 된 언더 아머를 16살짜리 아이에 비유하는 것을 즐긴다. “본바탕은 착한 아이인데, 가끔씩 말썽을 피울뿐입니다.” 이 아이가 21살이 되면 더 성숙해질 것이라고 그는 기대하고 있다.

플랭크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신생 기업 언더아머가 중견 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경영자 자리를 꾸준히 지켰다. 침체된 시장에서 언더 아머가 성장 동력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언더 아머 직원 4,500명 중 2,000명 정도가 볼티모어 시 권역에서 일하고 있다. 현지 경제에 엄청난 부양효과가 아닐 수 없다. 올해 언더 아머는 626억 달러를 들여 타이드 포인트 콤플렉스를 통째로 사들였다. 이곳에 곧 2만 제곱피트 규모의 소매 매장을 지을 계획이다.

플랭크를 오늘에 어울리는 리더로 만든 비결은 불‘ 가능해 보이는 것도 사실은 가능할 수 있다’는 궁극적인 교훈과 관련이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죽음이 두려운 기업가는 ‘아직 때가 아니야’라며 변명을 하겠지만, 좋은 때가 따로 있는건 아닙니다. 저 또한 기술기업 붐이 일 때 의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나오십시오. 창고 밖으로 나와서 기회를 만들고 사업을 시작하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단, 회사 이미지를 대표할 거점 도시를 찾고 있다면 볼티모어는 이미 다른 회사 몫이니 눈독을 들이지 않는 편이 좋겠다. 데이튼 Dayton, 잭슨 Jackson, 해리스버그 Harrisburg 같은 곳에서도 사업은 해볼 만하다.

언더 아머 제품 디자인실 문 위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우린 아직 우리를 정의하는 상품을 만들지 못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경 마켓시그널

헬로홈즈

미미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