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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중심 경영으로 두산의 미래 그린다

포춘코리아 CEO 500 /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공격적 M&A로 그룹 환골탈태 주도

박용만(58) 두산그룹 회장이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에 합류했다.

회장단은 대기업 오너들로 구성돼 있다. 두산가에선 박용현(70) 두산연강재단 이사장이 2012년 3월 그룹 회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올해 초까지 회장단 활동을 계속 해왔다. 지난 한 해 동안 그룹 경영에 올인했던 박용만 회장은 이번 회장단 입성으로 향후 재계에서 역할이 더욱 커질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차병선 기자 acha@hk.co.kr


박용만 회장은 고(故)박두병 두산 초대회장의 5남이다. 1955년 출생한 박 회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 한국외환은행에 입사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두산이 아닌 다른 회사에 취업을 한 건 박두병 선대 회장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남의 눈칫밥부터 먹어봐야 한다"며 자식들의 경영수업을 외부에서 쌓게 했는데, 이런 전통은 박정원(51) 두산건설 회장 등 두산 4대째까지 이어지고 있다.

박용만 회장의 외환은행 생활은 길지 않았다. 3년 뒤인 1980년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마친 박 회장은 이후 1982년부터 두산건설, 두산음료, 동양맥주, 두산동아 등 주요 계열사에서 다양한 실무경험을 쌓았다.

박 회장이 두산에 입사했을 때 두산그룹을 맡고 있던 사람은 맏형 박용곤(81) 두산 명예회장이었다. 맏형과 박용만 회장 간 나이 차이는 무려 23세나 된다. 옛날 같았으면 부자지간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나이차였다. 그리고 실제 박용곤 명예회장이 해온 역할은 형제 그 이상이었다. 부친 박두병 초대회장이 1973년 사망했을 때 박용만 회장의 나이는 18세였고, 박용곤 명예회장은 41세였다. 사춘기 막바지에 이른 박용만 회장이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에 나가 경영수업을 쌓는 동안 원숙한 박용곤 명예회장이 가장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으로 보인다.

두산그룹은 박두병 초대회장이 사망한 이후 전문경영인 정수창 회장이 운영해오다 1981년부터 다시 박용곤 회장이 맡기 시작했다. 이듬해 두산에 합류한 박용만 회장은 가까이에서 그룹 경영을 지켜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박용만 회장이 경영전면에 동참하기 시작한 건 1995년 두산그룹 기획조정실장 겸 부사장으로 선임되면서부터다. 이때 나이가 40세. 탄탄한 실무 능력을 갖춘 남자라면 본격적으로 두각을 낼 수 있는 시기였다. 박 회장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두산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맥주, 소주 등 각종 주류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켜오던 두산은 1990년대 들어 국내외 경쟁업체에 치이면서 시장을 조금씩 내주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무리하게 차입금을 들여 시설투자를 늘린 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박용만 회장은 과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95년 회사의 재무구조를 보면 거의 부도 직전이나 다름없었어요. 위기에 대한 대응이 절실할 때였죠"라고 회고한 바 있다. 이에 박용만 회장을 비롯한 최고경영진은 오랜 가업인 주류사업을 과감히 접기로 하고 구조조정과 자산매각에 나섰다. 그 덕분에 1997년 초반 현금흐름을 플러스로 전환시킬 수 있었고, 그해 가을에 불어닥친 외환위기를 큰 탈 없이 넘길 수 있었다. 성공적인 수성이었다. 그렇지만 박용만 회장을 더욱 돋보이게 한 건 그 이후의 일이다.

1998년 (주)두산 사장에 오른 박용만 회장은 주류를 대신할 신사업을 찾아야 했다. 직접 M&A팀을 진두지휘하며 다각적으로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ISB(Infrastructure Support Business)에 주목하게 되었다. ISB 사업은 도로, 철도, 항만, 공항과 같은 사회간접시설뿐만 아니라 에너지, 국방, 생산설비물류, 운송설비까지 망라하는 사업으로 글로벌 시장규모가 연간 수천조 원대에 이르는 거대 시장이었다. 주류를 대신할 먹거리로 딱 맞는 사업이었다.

박용만 회장은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인수를 시작으로 2003년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잇달아 사들이며 두산그룹을 소비재 기업에서 중공업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과정에서 대주주이자 전문경영인으로서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박 회장은 2005년 (주)두산 부회장,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 등으로 승진하며 두산을 이끄는 핵심 축으로 자리를 굳혀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던 중 예기치 못한 암초를 만났다. 이른바 '형제의 난'이었다.

2005년에는 두산가 2남인 고(故) 박용오 회장이 그룹 총수를 맡고 있었다. 그때 장남 박용곤 명예회장이 그룹 회장직을 3남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다. 박용오 회장은 이에 불만을 품고, 박용성(73) 회장과 박용만 회장이 불법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진정서를 검찰에 냈다. 형제경영의 모범 사례로 꼽히던 두산 가문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 후 박용성 회장과 박용만 회장은 책임을 지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검찰 조사 결과, 두산그룹 총수 일가가 10여 년간 286억 원의 비자금을 횡령해 개인적 용도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2006년 박용성 회장과 박용만 회장은 징역 및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듬해 2월 특별 사면되어,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그리고 같은 해 박용만 회장이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에 선임됐다.

그룹 회장 자리는 2009년 4남 박용현 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에게 넘어갔다. 형제 경영의 전통을 지키는 동시에 형제의 난을 수습하는 포석이었다. 서울의대를 졸업한 박용현 회장은 서울대 교수로 30년간 재직하고 서울대 병원장을 지내는 등 그룹 경영에선 한발짝 떨어져 있던 인물이있다. 그리고 3년 뒤 박용현 회장은 그룹 경영에 욕심이 없다는 듯 일선에서 물러났다. 당연히 스포트라이트는 5남 박용만 회장에게로 옮겨졌다.

박용만 회장에겐 '검증된 CEO'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박용만 회장은 십여 건의 M&A를 통해 두산그룹을 180도 탈바꿈시킨 주역이었다. 수익도 크게 키웠다. 1998년 당시 3조4,000억 원대였던 두산의 매출은 회장 선임 직전 연도인 2011년 26조2,000억 원을 기록하며 8배 가까이 급증했다. 10%대 초반에 불과하던 해외매출도 40%까지 올라 글로벌 기업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룹 총수에 오른 박 회장은 이전과 다른 경영전략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스터 M&A'로 불리던 박 회장은 지난해 4월 기자간담회에서 "당분간 큰 M&A는 없을 것"이라며 "지금 추진해야 할 것은 강하고 경쟁력 있는 기업 문화를 육성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M&A로 재료를 끌어모았다면 이제는 이를 단단히 다지겠다는 뜻이었다. M&A는 두산의 사업구조나 덩치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박 회장은 말한다. "두산 역사는 110여 년에 이르지만, 구성원 대부분은 두산 명함을 쓴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아요. 임직원 중 절반이 외국인이죠. 하나의 기업 철학과 문화 아래 행동과 사고, 가치의 기준을 통일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박 회장은 인재의 가치를 매우 중시한다. 그의 취임사에도 그런 뜻이 나타나 있다. "사람은 시스템과 역량만으로도 세계를 제패할 수 있습니다. 인재 확보를 통해 승부를 내는 게 가장 확실하고 지속가능한 길입니다." 박 회장은 2G(Growth of People, Growth of Business) 전략을 두산의 핵심 전략으로 세웠다. 2G는 사람의 성장을 통해 사업을 성장시키고, 사업의 성장이 다시 사람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의미한다.

실제 박용만 회장은 인재 확보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 대학교 신입사원 채용설명회에 직접 참석해 학생들에게 회사의 비전을 제시하고 동기부여를 한다. 해외 MBA졸업생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직접 현지로 날아가 면접을 보기도 한다. 또한 매년 열리는 신입사원 환영회에 참석해 사원들과 술잔을 나눈다. '사람이 미래다'라는 광고 카피도 박 회장이 직접 작성한 문구다.

박 회장은 사람 간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고 팀플레이에 높은 가치를 둔다. "기업의 의사결정은 고독한 영웅이 밤을 지새며 내리는 결정이 아닙니다. 여건, 자원 등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도달하는 결론이죠. 리더는 모든 고려 요소가 투명하게 상하 없이 논의되고 그동안 조직이 쌓아온 경험과 역량이 신속히 발휘되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평소 박 회장이 강조하는 말이다. 박회장은 "CEO는 구성원의 역량을 극대화시켜주는 코치가 되어야 한다"며 코칭 리더십을 수시로 언급한다. 그는 직원들 회식 자리에도 수시로 끼며 격의 없이 소통하는 것을 즐긴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기업인으로선 전례 없이 TV에도 출연해 사생활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기업인에 대한 경직된 이미지를 깨고 소통하는 CEO의 모범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박용만 회장이 보여준 경영성과는 썩 좋지만은 않다. 3월 15일 현재 2012년도 사업실적이 공시되지 않아 확실하진 않지만, 증권가는 두산 주요 계열사의 실적이 전년보다 하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말한다. "지난해에는 경제 상황이 안 좋았고, 특히 중국 시장이 침체됐어요. 이로 인해 주요계열사 실적과 주가가 부진했죠." 하지만 아직 박 회장의 실력을 평가하기엔 이르다는 게 증권가의 중론이다.

다행이 밥캣에 파란등이 켜졌다. 밥캣은 박 회장이 2007년 49억 달러를 주고 인수한 건설장비 업체다. 외부에서 조달한 인수자금이 두산그룹에 재정부담을 주는 데다가 지난 몇 년간 실적도 부진해 박 회장을 적잖이 괴롭혔다. 그렇지만 밥캣은 지난해 3,000억 원 이상의 이익을 내며 턴어라운드에 성공했다. 박 회장은 "밥캣이 없었다면 2012년 두산실적이 실망스러울 뻔했다"며 애정을 표하기도 했다. 그간의 노심초사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박용만 회장은 근원적이고 중장기적인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에도 박 회장은 생산설비를 확대하고 첨단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주)두산은 지난해 7월 모트롤BG와 전자BG의 첫 해외 생산기지를 중국에서 준공했다. 두산중공업은 국내 처음으로 3㎿ 해상풍력 발전시스템 개발에 성공하면서 신재생 에너지 분야에서 차츰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또한 11월에는 영구 수처리 기업인 '엔퓨어'를 인수해 핵심기술을 확보했다. 이는 "저성장 시대 이후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박 회장의 경영전략을 따른 것이다.

두산 3세 형제들의 경영시기는 갈수록 짧아지는 추세다. 장남은 15년, 2남은 8년, 3남은 4년, 4남은 3년간 그룹 회장을 맡았다. 6남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은 두산가 경영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 4세가 부상할 시기도 멀지 않아 보인다.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인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 겸 대표이사가 턱 밑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박용만 회장이 얼마나 그룹 회장을 맡을 지는 모른다. 두산가의 결정에 달렸다. 하지만 확실한 건, 박용만 회장이 그 누구보다 경영성과가 기대되는 CEO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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