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 연구개발특구는 우리나라가 대외원조 수혜국에서 지원국가로, 가내 수공업 체제에서 중화학 공업을 거쳐 지식경제 기반 사회로 발전하는데 주춧돌을 놓았다. 이는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진실이다. 국내 정보통신 기술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데 기여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이동통신 기술을 비롯해 정보기술, 원자력, 우주항공, 생명공학 등의 과학기술분야 전반에서 그동안 이룩한 성과는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수많은 원천기술과 지식재산을 창출하며 우리나라 경제·산업이 고도 압축성장하는 데 허브이자 중심축 역할을 수행해왔다. 세계 5대 과학기술 강국이라는 우리의 빛나는 위상은 이 같은 대덕특구의 힘이 밑바탕 됐다.
연구교육단지 마스터플랜
1973년 1월 17일. 당시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순시 때 홍릉연구단지를 넘어서는 제2의 연구단지 건설계획을 보고했다. 1971년 7월 과학기술처가 수행한 ‘연구교육단지 건설을 위한 마스터플랜’이 주요 내용이었다.
핵심 골자는 선박·기계·석유화학·전자 등의 전략산업 기술연구기관을 단계적으로 설립하고, 서울에 산재돼 있었던 국공립연구기관을 한 곳에 집결시켜 연구 기능을 극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를 통해 국가발전을 이끌어낼 과학기술들을 효과적으로 개발하고, 전국적으로 확산할 수 있는 세계적 수준의 과학두뇌도시를 건설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이 구상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구체적 방안 마련을 지시했다. 이에 4개월 뒤인 5월 18일, 연구단지 건설계획에 대한 보고회가 개최됐다.
이날 보고된 연구단지 건설의 필요성은 5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중화학 공업의 기술지원을 위해서는 조선 및 금형 설계·제작기술 등 4대 전략산업기술별로 전문화된 연구기관의 신설이 필요하다. 둘째 연구기관을 한 곳에 집중시킴으로써 연구시설의 공동 활용과 투자의 효율화를 추구할 수 있다. 셋째는 연구단지를 통해 지적공동체가 형성되면 연구원 및 기술정보의 상호교류 활성화가 가능하다. 덧붙여 서울에 집중돼 있는 국립시험연구기관을 이전 집결시켜 연구 능률 제고를 도모할 수 있고, 홍릉연구단지의 운영 경험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필요성의 하나로 제시됐다.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던 새 연구단지의 입지는 지형, 교통, 용수, 주변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대덕이 최적 후보지로 꼽혔다. 국가과학기술 연구가 홍릉 시대에서 대덕 시대로 전환되는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 것이다.
대덕 시대의 개막
보고회가 있은 뒤 열흘 뒤인 1973년 5월 28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구단지 건설과 관련한 일련의 계획을 승인했다. 같은 해 11월 30일 대덕연구학원도시 일원을 교육 및 연구지구로 지정하는 건설부의 고시가 이어졌고, 본격적인 단지 조성이 시작됐다. 1974년 3월 진입로 건설과 함께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와 한국선박연구소(현 한국기계연구원)가 연구소 건설을 개시했고, 1975년과 1977년에는 각각 한국화학연구소(현 한국화학연구원)와 한국핵연료개발공단(현 한국원자력연구원)이 그 뒤를 따랐다. 이후 1978년 3월 표준연을 선두로 하여 정부출연연구소들의 입주가 본격화됐다.
특히 기반시설과 인프라 공사가 한창이던 1979년 10월 25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비서실장과 경호실장만 대동한 채 건설현장을 불시에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의한 시해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이었다. 국민 과학화 운동을 제창할 정도로 과학기술 선진화를 강조했던 박 대통령은 대덕단지의 성공적 건설이 국가 산업·경제 발전의 열쇠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부의 관심과 지원 속에 출연연을 넘어 쌍용중앙연구소 등 민간기업 연구소의 입주가 잇따르면서 대덕단지의 집적화가 가속화됐고, 1992년 11월 27일 국립중앙과학관에서 대덕연구단지 기반 준공식이 거행했다. 그렇게 대덕은 연구단지로서 완성단계로 접어들었다.
한편 1993년 8월부터 11월까지 개최된 대전 엑스포는 대덕연구단지의 20년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과학기술, 경제, 문화, 환경, 지역발전 등 여러 분야에서 고른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1997년 불어 닥친 IMF 외환위기가 대덕연구단지의 기능을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진 것. 하지만 위기는 기회이기도 했다. 연구소를 떠난 연구원들이 창업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면서 연구와 상업화가 접목된 능동적 연구단지로 진화하는 기틀이 마련됐다.
이와 맞물려 1999년 12월 관련 법령이 개정되며 대덕연구단지는 공식적으로 연구와 교육기능을 뛰어넘어 기업의 생산 활동을 아우를 수 있게 됐다. 또한 산학연 연계를 통해 경제성장 동력을 창출하고자 했던 정부가 2003년 대덕연구단지 조성 30주년을 맞아 혁신클러스터로의 전환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렇게 대덕연구단지는 산업계와 대학, 연구소 등이 상호협력하고 네트워킹하여 국가의 신성장동력을 창출하는 유기적 생태계를 적극 구축하기 시작했다.
연구개발특구로의 전환
2005년에 이르러 대덕연구단지는 또 한 번의 진화를 이뤄냈다. 정부가 대덕연구단지를 대덕연구개발특구로 지정한 것. 기술·산업·지역정책의 통합과 구성원 간의 활발한 네트워킹을 통한 비즈니스 성과 확산에 더욱 초점을 맞추려는 결정이었다. 이와 함께 기술과 산업의 융복합, 창업 활성화 등 새로운 임무들이 공식 부여됐다.
이 같은 대덕특구의 성공적 활약에 힘입어 정부는 2011년 대구·광주, 2012년에는 부산 지역에 연구개발특구를 추가 지정했다. 특구 육성 사업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4개 연구개발특구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할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도 2005년 설립됐다. 재단의 주요기능은 연구성과 사업화, 벤처생태계 조성, 글로벌 환경 구축, 특구 인프라구축 및 타 지역과 연계 등이다.
이를 위해 재단은 첨단융합산업(대덕), 광기반 융복합 산업(광주), IT기반 융복합 산업(대구), 조선해양 플랜트산업(부산) 등 각 연구개발특구별 중점 특화분야를 선정해 세계적 거점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다각적 노력을 전개하고 있는 상태다. 또 각 특구가 보유하고 있는 우수기술들을 발굴, 기술이전과 거래를 지원함으로써 기술사업화 성공사례를 도출하고 있으며 특구 간 연계사업화와 연구소기업 설립 지원 등 공공기술 이전 및 직접 사업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특구 고유의 연구소기업, 첨단기술기업 지정제도의 효율적 운영과 지속적인 제도 개선 등을 바탕으로 기술 창업과 기업 성장 촉진에도 주력하고 있다. 특히 법인세 감면 등의 혜택을 부여, 기술로 창업해 성장할 수 있는 비즈니스 환경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창조경제 거점기지
지난해 말 기준 대덕특구에는 출연연을 필두로 공공기관, 기업 등 1,401개 기관이 입주해 있다. 1,312개 입주기업들이 창출하고 있는 매출규모는 연간 16조6,980억원에 달한다. 이와 맞물려 박사 1만333명, 석사 1만856명 등 대덕특구 내에서 활동 중인 연구기술직 종사자의 수는 2만7,423명에 달한다. 생산직 인력도 3만6,898명이나 된다. 이렇게 현재 대덕특구는 총 6만명 이상의 전문 인력들로 구성된 연구개발과 벤처생산 거점지역으로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난 40년간 대덕특구가 창출한 연구성과는 대단하다는 표현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국내특허가 9만2,118건 출원돼 4만6,661건이 등록됐으며, 해외출원 또한 4만3,067건이 출원돼 1만246건이 등록됐다. 기술이전 건수는 906건으로 총 999억6,200만원의 기술 이전료 실적을 올렸다. 특히 한국전자통신연구원과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세계적 수준의 원천기술을 개발, 각각 169조8,000억원과 34조4,000억원이라는 막대한 경제유발효과를 창출하기도 했다.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은 앞으로 대덕특구를 포함한 4개 연구개발특구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연계시켜 창조경제의 핵심 거점기지로 발돋움시키는 데 중점을 둘 방침이다. 창조경제의 개념이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창업과 기술사업화, 그리고 이를 통한 일자리 창출 등으로 초점이 모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혁신클러스터이자 국가 연구개발 허브로서의 역할도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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