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원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이동건(가명)씨는 최근 자산포트폴리오를 싹 교체했다. 5억원의 정기예금에서 3억원을 인출했다. 이 돈으로 인도 국채 1억원어치를 샀다. 또 1억원으로는 3개월짜리 통화안정채권을 샀고 나머지 1억원 중 5,000만원은 주식형펀드를, 나머지 5,000만원은 증권계좌에 넣었다. 이씨는 "정기예금 금리가 2% 중반대에 불과해 저축의 의미가 거의 없다"며 "통안채 만기가 되면 다시 새로운 상품으로 갈아탈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내 시중은행 본점에서 프라이빗 뱅킹(PB)영업을 총괄하고 있는 A부장은 최근 자산가 고객을 응대하느라 분주하다.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고객이 원하는 바가 각양각색이라는 것. 그는 수익률 높이기를 원하는 고객에게는 주식 같은 위험자산을 포함해 제3세계의 국채까지 추천한다. 고객은 자산 갈아타기를 서슴지 않는다. 물론 재테크의 방점을 '절세'에 찍은 고객에게는 비과세 상품을 적극 권한다. A 부장은 일부 자산가들은 소득노출 자체가 싫어 금고를 구매해 현금을 보관해두고 있다고 귀띔했다.
속성의 변화는 새로운 흐름을 탄생시킨다. '머니 노마드' 역시 마찬가지다. 금융소비자가 노마드화(유목민화)하는 것은 금융시장의 여건이 급변한 영향이 크다. 만성적인 저금리 기조는 고객의 수익률 갈증에 불을 지폈고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은 자산가들이 돈을 굴리는 패턴을 변화시키고 있다.
◇신상품 대응 빨라진 머니 노마드=머니 노마드가 급속히 확산되는 데는 무엇보다 저금리의 영향이 크다. 현재 정기예금의 세전 수익률은 2%대 후반에 불과하다. 물가상승률(약 1.7%)을 감안하면 저금이 아닌 '보관'이라고 보는 게 옳을 정도다. 반면 새로운 상품은 줄줄이 출시된다. 정기예금 수익률을 능가하는 상품이 출시되면서 자산가들의 돈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최근 기업은행과 신한은행은 미국 부동산시장에 투자하는 신탁형 상품을 출시했다. 신한은행이 3월28일부터 4월3일까지 판매한 '교보악사미국부동산증권투자신탁 1호'에는 196억원의 자금이 몰렸다. 기업은행이 출시한 '동양미국리츠연계사모증권'에는 단기간 설정목표액인 35억원을 채웠다.
이영아 기업은행 PB고객부 과장은 "최근 증권사가 일종의 미끼 상품으로 3개월짜리 통안채에 추가 금리를 주면서 판매하자 정기예금을 깨면서까지 가입하고자 하는 고객이 많았다"며 "자산가의 투자 패턴이 그만큼 단기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초 이후 '적금 풍차 돌리기'가 성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전 같았으면 1년제 1,200만원짜리 적금에 가입했던 고객은 이를 100만원으로 나눠 12개월에 걸쳐 따로 가입한다. 간헐적으로 나오는 신상품을 놓치지 않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투자자의 신상품 대응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머니 노마드, 국경도 넘나든다=수익률을 좇아 국경을 넘는 머니 노마드가 가장 두드러지게 관찰되는 곳은 아무래도 주식시장이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 1ㆍ4분기 해외직접투자 금액(외화증권 결제금액)은 58억8,000만달러로 직전 분기에 비해 40%가량 급증했다. 결제 건수 역시 2만5,039건으로 같은 기간 36% 증가했다.
지역별로는 유로채 결제금액이 18% 증가한 데 반해 미국, 일본, 홍콩은 각각 195%, 74%, 80%로 크게 올랐다. 이들 3개국은 올 들어 지수 상승률이 높은 곳으로 투자자 수요가 수익률을 찾아 이동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채권시장에서도 머니 노마드 현상은 목격된다. 현재 시장에는 인도ㆍ터키ㆍ남아프리카공화국ㆍ러시아 등 이머징 국가의 채권상품이 쏟아지고 있다. 또 나오는 대로 즉시 절판된다. 은행 금리는 너무 낮고 주식형펀드는 불안해 하는 수요주가 주된 타깃이다. 특히 이머징 채권은 최소가입금액이 수천만원 단위여서 자산가들이 즐겨 찾고 있다.
동양증권은 3월 말 인도 국채를 판매했는데 하루 동안 500억원의 자금이 몰렸다. 인도 국채는 국채 중에서도 위험자산으로 분류돼 수익률이 약 10% 정도에 달한다. 비과세 상품이 아닌데도 이처럼 투자자의 반응이 뜨거운 것은 그만큼 수익률 갈증이 심하다는 반증으로 해석된다. 동양증권은 이달 중 인도 국채 추가 판매에 나설 계획이다.
안정균 SK증권 연구원은 "투자상품이 다양해지다 보니 투자자들도 하나의 상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투자에 나서고 있다"며 "이들에게는 투자 국가와 자산을 갈아타는 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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