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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회장 방북결산... 정회장의 대북사업 이력서
입력1998-11-01 00:00:00
수정
1998.11.01 00:00:00
「부도옹(不倒翁)」, 「좌절을 모르는 노병(老兵)」 「불도저」….「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자서전처럼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은 결국 해내고야 말았다.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만나 대북경협사업을 담판지었다. 올해 나이 여든넷이다.
정치적 이념을 극복하고 그는 한반도에 평화의 훈풍을 몰고왔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그는 북한과 광범위한 분야에서 경제협력을 하기로 했다.
서산 농장을 지을 때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폐선(廢船)으로 간만의 차를 극복했듯이 그는 이번에도 「피」를 내세워 동토(凍土)의 땅을 녹이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지금은 북한땅이 된 강원도 통천출신의 실향민인 鄭명예회장이 경제협력을 통해 폐쇄적인 북한의 문을 열고 궁극적으로 남북화해의 물꼬를 트겠다는 장대한 포부를 품고 북한을 첫 방문한 것은 지난 89년 1월.
당시 74세로 정력적인 활동을 하던 그는 지금은 고인이 된 북한 노동당 서열 4위인 허담(許淡)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 금강산공동개발에 관한 의정서까지 들고 돌아왔다.
鄭명예회장은 당시 시베리아와 북한을 연결시키고 북한을 다시 남한과 연결시키겠다는 원대한 구상도 품고 있었다. 대표적인게 세계 최대 가스매장량을 자랑하는 소련 야쿠츠 유전. 그는 이 유전의 가스를 북한을 거쳐 파이프 라인으로 남한에 들여오는 방안을 추진했다. 야쿠츠 유전의 가스 매장량은 남북한, 일본이 100년을 써도 남을 방대한 분량. 그는 앞으로의 세기는 자원을 잡아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천연자원이 풍부한 시베리아를 잡아야 남북한 경제가 같이 발달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북한은 두달후인 4월에 다시 방문해주길 원했고 鄭명예회장도 약속했지만 鄭명예회장의 재방북은 10년에 가까운 길고 긴 시간이 흘러 지난 6월에야 이뤄질 수 있었다.
13대 대통령 출마와 뒤이은 선거패배로 그는 심한 정치적압박을 받으며 은둔생활을 강요받아야 했다.
그는 이 기간중에도 『금강산 개발은 나에게 반드시 해야될 과제로 남아 있다』며 정부 요로에 자신의 의사를 타진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鄭명예회장의 대북프로젝트는 신정부가 출범한 4개월후인 지난 6월 「최고의 전위예술」로 평가받았던 소떼 방북으로 또다시 살아났다. 그는 넘지못할 벽으로만 여겨졌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에 들어갔고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과 면담도 성사시킨 후 화려하게 서울로 돌아왔다.
일각에서는 鄭명예회장이 金위원장과 대북경협 합의에 성공하자 아쉬운 시각도 보내고 있다. 왕성하게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나이의 벽은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국민학교 밖에 안나오고 밀어붙이기만 한다고 해서 내가 「불도저」로 불렸던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결코 덮어놓고 덤벼든 적이 없다. 나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나는 적어도 생각하는 불도저다』고 그는 강조한다.
1만원권 지폐 한 장 달랑 들고 모래벌판에 세계 최대조선소인 현대중공업을 세웠고, 남들이 비웃던 주베일 산업항공사를 따냈던 그의 신화같은 저력과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으로 세계굴지의 기업으로 현대를 키운 정주영(鄭周永), 그가 그리고 이룰 경협의 그림이 기대된다.【정승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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