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중생 딸이 교실서 참담하게… 충격
[이슈 인사이드] 같은 처지 친구·가족끼리 위로·소통… "세상이 달라 보여요"■ 학교폭력·왕따 피해 치유 프로그램
권대경기자 kwon@sed.co.kr
제주=박윤선기자 sepys@sed.co.kr
무관심으로 끙끙 앓던 상처 서로 어루만지며 참회 눈물
또래 상담가 교육 현장선 맞장구 쳐가며 함께 답 찾아
지자체·교육당국 등 합심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 필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이니까 좋아요. 애들도 친하게 지내는 것 같고, 엄마들은 정보도 나눴어요."(제주 힐링캠프 참여 학부모)
학교폭력과 왕따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교육 현장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학교폭력 피해자들이 함께 떠나는 여행, 학교폭력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꼽히는 가족 소통을 돕는 프로그램, 교실에서 작은 고민도 상담해 주는 또래 상담가까지 그 형식과 내용도 다채롭다. 교육 전문가들은 "사회에서 상처를 입은 학생일수록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좋다"며 "지역사회와 지자체, 교육당국이 합심해 사전 예방과 사후 치유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학생과 학부모 교사도 이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학교폭력 피해학생 어루만진 힐링캠프=지난 16~17일 학교폭력 피해를 입은 16 가족이 제주에 모였다. 교육과학기술부ㆍ김정문알로에 주최로 열린 힐링캠프에 참여한 가족들이다.
가족마다 사연은 기구했다. 올해 중3인 한 여학생은 '더럽다'는 이유로 교실에서 남학생들에게 발길질을 당했다. 한 겨울 속옷 차림으로 집단 구타를 당하다가 목격자의 신고로 구출된 아이도 있다.
폭력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주변의 무관심도 피해 가족을 힘들게 한다. 한지수(가명ㆍ14)양의 경우 피해사실을 안 부모가 바로 117(학교폭력신고전화)에 전화했지만 통화가 되질 않았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과 지역 청소년 센터에도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지만 변호사를 고용해 연락을 할 때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모른 척 하던 학교는 부모가 아이에게 쥐어준 녹음기에 녹취된 내용을 교육청으로 보낸 후에야 대응을 시작했다. 한양의 이모 권현아(가명ㆍ47)씨는 "엄마가 애한테 증거라도 남게 흠씬 두들겨 맞고 오라고 말한 적까지 있다. 오죽 속상하면 그랬겠나"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이틀간의 캠프에서는 모두 상처를 잊고 여느 가족들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 모녀는 이틀 내내 커플티를 입고 다니면서 모녀애를 과시했고, 한 부자는 휴양림에 마련된 유격 훈련장에서 체험을 하며 정을 돈독히 했다. 캠프에서 마련한 비누 만들기, 댄스 테라피, 휴양림 걷기, 물놀이, 소아정신과 전문의 강연과 상담 등 각종 활동을 하면서 학생들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부모와 소통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캠프에 참가한 한 학생은 "늘 부모님이 바빠서 여행 올 기회가 없었는데 캠프에서 엄마랑 친해져서 좋았다"면서 "댄스 테라피도 재미있었고, 휴양림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걸은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이번 캠프에서 스트레스 해소법에 대해 강의한 곽영숙 제주대의대 교수는 "캠프는 1회성이라는 한계가 있다"면서도 "비슷한 일을 당한 친구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되고, 피해 부모님들도 서로 정보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불통가족이 소통가족으로=학교폭력이나 왕따 문제의 뒤편에는 항상 소통이 없는 가족 관계가 따라다닌다. 이런 현실에 맞춰 가족관계 회복 프로그램이 학교폭력 치유책으로 최근 각광받고 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인천교육청의 장기위탁대안기관인 한오름학교에서 실시하는 '부자(父子) 일체 감동 캠프'다. 인천의 부자캠프는 '아버지는 학교에 오지 않는다'는 부정적 고정관념을 깨 보자는 데서 출발했다. 매주 금요일 오후 3시부터 밤 10시까지 진행되는 캠프는 아버지 또는 어머니와 자녀가 함께하는 편지쓰기, 세족식(발 씻어주기), 올바른 스킨십, 영상물 시청 등으로 구성돼 있다. 매주 약 20명이 참여하고 있어 지역사회에서는 이미 유명하다. 인천 서창중학교에 다니는 자녀와 함께 참여한 이모씨는 "처음에는 그저 따분한 강의겠거니 했으나 막상 와서 보니 다르다"며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행동을 못한 부모였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앞으로는 많은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인천 진산중학교 자녀와 함께 한 정모씨는 "딸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학교 서현석 교감은 김모씨와 같이 교육 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교육 방침을 후회하는 부모들이 많다고 전했다. 학교폭력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 같은 프로그램은 널리 확산돼야 한다는 게 김 교감의 주장이다. 부산에서도 부자캠프가 진행되고 있다.
◇서로서로 치유하는 또래의 힘=청소년에게 가족의 존재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존재가 바로 친구다. 18일 서울 양천구 신월동 강서교육지원청에서는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해 줄 '또래 상담가'가 될 학생들이 한창 교육을 받고 있었다. Wee센터에서 또래 상담가를 양성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해부터, 교육청 차원에서 학생들을 상담가로 교육시키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이 밖에도 또래 상담가의 효과를 알아 본 개별 학교에서도 관심을 갖고 또래 상담가를 길러내기도 한다.
이날 학생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방법, 상대방의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해결책을 찾아보는 대화법에 대해 배웠다. 이미 친구들 사이에서 '고민 상담사'역할을 하고 있다는 김도현(14ㆍ명덕여중 3)양은 "해결책이나 답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맞장구를 쳐주고 공감도 해주면서 기분을 풀어줄 수는 있다"며 "좀 더 전문적으로 친구들을 상담해 줄 수 있는 법을 배워 기쁘다"고 소감을 말했다
또래 상담가 교육을 받으면서 스스로 치유의 계기로 삼는 경우도 있다. 고승민(15)군은 초등학생 때 심한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다. 고군은 "중학교 1학년 때 나처럼 왕따를 당한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상담에 관심이 생겼다"고 또래 상담자를 자청한 이유를 밝혔다. 그는 "지금도 말을 할 때 직설적이고 성격도 욱하는 면이 있다"며 "친구들과 친근하게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참을성 있게 고민을 들어주는 연습도 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교육을 맡은 강석영 문래Wee센터 상담교사는 "또래 상담사는 교사가 하나하나 신경 쓸 수 없는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도 있고, 문제가 심각할 경우 교사와 학생을 연결하는 다리가 될 수 있다"고 장점을 꼽았다. 그는 "이 학생들은 정말 건강하고 밝은 아이들"이라며 "이 친구들이 학교 현장에 퍼져 나가서 이 건강한 기운을 주변에 퍼뜨리는 존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족이 모두 상담치료 받아야 가족애 살아나고 회복도 빨라교내 심리 치료 시스템 정착도 시급여느 또래와 다를 바 없이 친구들과 PC방에서 게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최재현군(가명ㆍ15). 제주도에서 열린 힐링캠프에서 만난 최군의 얼굴은 밝았지만 그 역시 올해 1월 학교폭력으로 전치 5주의 골절상을 입은 피해자다.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최군이 그나마 빠르게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던 데는 온 가족이 함께 받은 상담치료의 공이 컸다.
"대학생ㆍ고등학생 누나 둘을 포함해 가족 모두 상담치료를 받았어요. 일이고 뭐고 아이가 우선이잖아요." 어머니 박진아(49)씨는 상담을 받았던 지난 5개월 간 각자 바쁘고 모일 시간이 없었던 가족들이 똘똘 뭉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학교폭력이나 왕따 문제가 발생하면 보통은 아이만 상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소아정신과 의사로 35년간 활동하면서 오래 전부터 학교폭력으로 어려움을 겪은 아이들을 돌봐온 곽경숙 제주대의대 교수는 가족 상담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모들이 자녀의 폭력 피해 사실 앞에 죄책감과 충격을 심하게 받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화를 내거나 눈물을 보이는 부모의 모습을 보는 아이들은 더욱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는 전문 상담자에게 털어놔야 한다. 곽 교수는 "아이를 챙기다 보면 자신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잘 깨닫지 못하는데, 부모도 상담과 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피해학생과 가족, 나아가 가해학생과 그 가족까지 지속적으로 상담을 받을 수 있으려면 '학교 자문의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곽 교수는 제안한다.
학교로 정신과 전문의가 찾아가 치료가 필요한 학생들을 돌보고 교사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학교 자문의 제도'는 현재는 지역ㆍ학교별로 산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를 정식 시스템으로 정착시켜 학교폭력 등 심리적 치료가 필요한 사안에 보다 빠르게 대응하자는 것이다.
곽 교수는"치료가 필요한 학생들이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면서 상담을 받기도 힘들고, 전문적인 상담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모르는 분들도 있다"며 "학교 자문의 제도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