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밤에 만난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특유의 웃음을 잃지 않았다. 기자들과 유머를 섞어가며 말하는 여유를 보이면서도 감독정책에 대한 질문으로 들어가면 "모든 현안을 다 컨트롤하고 있다"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저금리ㆍ저성장 탓에 금융사의 건전성과 수익성에 문제가 생기고 있고 STX 같은 대기업 부실이 발생하고 있지만 나름의 방파제를 쌓고 있다고 했다.
최 원장은 전날 저녁 신임 임원들과 장시간에 걸쳐 허심탄회하게 금감원의 앞날에 대해 얘기를 했던 상황. 이 때문인지 어느 때보다 금융산업에 대한 생각이 또렷하게 정리돼 있었고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러면서 금융감독당국의 무게감을 내내 강조했다.
금융사 건전성 없으면 소비자 보호도 불가능
최 원장은 이날 금융회사의 '건전성'이라는 단어를 수십 차례 되풀이했다. 절박함마저 묻어났다. 그는 그러면서 은행의 건전성이 금융감독당국의 최우선 임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건전성과 시장 안정이 안 되면 소비자 보호도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취임 일성으로 금융시장의 안정과 금융회사의 건전성을 바탕으로 금융소비자 보호를 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게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는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요즘 임원회의 때마다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20일 자신의 발언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당시 최 원장은 "건전성과 대기업 부실에 대한 감독을 강화해야 한다"고 경고장을 날렸다. 그는 "당시 더 강한 톤을 고민하기도 했지만 너무 세게 하면 정말 위험하다는 신호를 시장에 보낼 수 있어 걱정했다"며 "지금 생각하는 금감원의 제1 원칙은 금융시장 안정과 금융 건전성"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금감원장의 생각을 잘못 읽고 있는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금리 기조 및 거액의 부실여신 발생 가능성에 대비해 철저한 리스크 및 건전성 관리를 강화해야 해요. 체계적인 기업 구조조정도 상시 추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기업 구조조정도 피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했다. 시장에서는 글로벌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대기업 부실이 심각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건설ㆍ해운ㆍ조선 같은 경기취약 업종은 이것이 현실이 되고 있다.
"저는 절대 일을 무서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습니다. 일을 미룰 게 아니라 고민해야 해요. 대한민국 경제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죠. 기업 구조조정 등 현안은 제가 확실하게 컨트롤할 것입니다."
여신분류 탄력적 완화
대화는 자연스럽게 금감원의 역할에 대한 부분으로 이어졌다. 최 원장의 발언에는 소비자를 위한 금융회사를 만들려면 금융당국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금감원의 모든 감독 검사를 소비자 보호와 1대1로 맞춰놓았습니다. 이를 기초로 앞으로 검사와 조사ㆍ감리 등 모든 것을 소비자 친화형으로 다 바꿀 계획입니다."
우선 검사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최근 STX 등과 관련한 대기업 부실이 화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은행 검사를 위한 검사를 하지 말라고 했다"며 "어려울 때는 여신분류를 탄력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 금감원의 감독과 검사 과정에서 금융기관 여신의 자산건전성 기준을 지금보다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대출은 부실 정도에 따라 ▦정상 ▦요주의 ▦고정 ▦회수의문 ▦추정손실 등 5단계로 나뉜다. 이 중 요주의 이하에 대해 적용 기준을 다소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 저축은행 사태 이후 금감원은 자산건전성 기준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왔다.
이는 역설적으로 금융사의 건전성을 위한 것이라고 최 원장은 설명했다. 저금리ㆍ저성장 상황에서 단순히 건전성을 지키기 위해 규제만 강화하면 되레 금융사의 기반 자체를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저성장 저금리가 지속되면 가계는 기존대출을 갚고 신규대출을 줄이면서 은행의 수익성이 떨어진다. 동시에 경기침체로 기업은 부실대출이 높아져 은행 건전성에 타격을 준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감독당국이 무조건 검사를 강화하면 은행은 엎친 데 덮친 격이 된다. 수익성은 나빠지고 대손충당금도 더 쌓아야 한다.
면책 기준 전면 재조정
최 원장은 "은행 면책제도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금융회사가 바뀐 면책제도를 내규에 반영했는지 혹은 반영했더라도 실행을 하고 있는지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최 원장은 중소기업 대출을 어렵게 하는 부실한 면책제도도 전면 재검토를 지시한 상태다. 지난해 4월 금감원은 시중은행과 정책금융기관에 중소기업 대출시 원칙을 지켰다면 설사 부실이 오더라도 해당 직원을 문책하지 않도록 면책규정을 강화했다.
그런데 1년 후인 지난 20일 최 원장과 만난 18개 시중은행의 차장급 실무진은 면책규정을 더 넓히고 구체화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은행 직원 입장에서 중소기업 대출이 잘못되면 승진 등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이 있다는 불안감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최 원장은 "박근혜 정부가 벤처ㆍ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사다리펀드의 성공도 면책제도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은행에 아무리 중소기업을 지원하라고 해도 대출 뒤 사고가 터졌을 때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한다면 어떤 은행 직원도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성장ㆍ저금리 '가보지 않은 길'…"요즘 잠이 안 온다"
최 원장은 금감원의 업무체계를 확 뜯어 고치겠다는 말도 했다. 최근 발표한 약관 심사 간소화를 시작으로 금감원의 업무 프로세스를 혁신하겠다는 것이다. 최 원장은 "검사ㆍ조사ㆍ감리 등 모든 것을 다 바꾸겠다고 했는데, 특히 금융회사의 약관 심사 간소화는 금감원 개혁 시리즈 1탄"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최 원장은 금감원이 시장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업무조정 과정에서도 한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금융은 실수가 있으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최 원장은 "저금리ㆍ저성장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고 오래가기 때문에 헛다리를 짚을 수 있다"며 "그래서 요즘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고민을 한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 소비자 보호 강화도 계속 추진하기로 했다. 그는 "금융감독 검사국에 약관 문제를 혼자 보지 말고 소비자보호처와 함께 보라고 지시했다"며 "모든 금감원의 감독ㆍ검사 업무를 소비자 보호와 연결시켜놓았다"고 전했다. 최 원장은 또 "기존 금감원의 업무방식으로 보면 이상한 것이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가야 한다"며 "은행이나 보험 등 약관과 관련한 것 중 금융소비자 보호에 대한 것은 묶어서 책으로 내라고 한 상태"라고 말했다.
금감원 낙하산 미련 버려야
최 원장은 "요즘 직원들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많이 한다"고 했다. 금감원을 퇴직한 후 후학을 양성하거나 개발도상국과 지식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금감원 직원들이 금융사에 감사나 임원으로 가는 데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금감원에 있다 중간에 반드시 금융회사 감사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바꿔야 해요. 아직도 금감원에는 업계에 대해 강자의 문화가 남아 있는데 금감원에서 뼈를 묻어야 합니다. 금감원 직원이 돈과 권력, 자리(직장)를 다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하나만 가지면 행복한 게 아닙니까."
최 원장은 금감원에서 퇴직한 직원이 금융기관에 취업해온 관행에 대해 더는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공직자 윤리법 강화로 최근에는 금감원 직원이 금융회사에 재취업하기가 어려워졌다.
최 원장이 생각하는 금감원 퇴직자의 바람직한 모델은 금융 공적개발원조(ODA)다. 개발도상국이나 더 어려운 나라에 우리나라의 금융산업과 감독발전에 대한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다. 최 원장이 ODA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8년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서 수석행정관을 하면서다. 그는 "수석부원장 시절이던 지난해 8월부터 준비해서 보고서를 만들어놓았다"며 "직원들에게 조심스럽게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감원 직원은 무게감 있어야"
최 원장은 직원들에 대한 부탁도 잊지 않았다. 그가 꺼낸 이론은 '무사론.'
"무사는 칼을 꺼내면 소용이 없어요. 칼을 칼집에 넣어놓을 때가 무서운 것이지. 상대방이 저 칼이 길까 짧을까, 빼면 어떻게 쓸까 두렵게 만들어야 해요. 금감원 직원들도 그런 사람이 돼야 합니다."
금감원 직원들이 하는 검사에는 무게감이 있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금감원 직원이 은행에 검사 나가서 이 직원 저 직원 다 불러놓고 추궁하면 은행에 금감원이 (手)를 다 보여주는 거예요. 금융사에는 전직 금감원 직원 등 금감원 검사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 도처에 깔려 있죠. 수를 보여주면 안 돼요. 고수는 상대방에게 낮은 자세로 하면서 할 말 다 합니다. 그리고 핵심을 지적하는 것이죠."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