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7월 말에서 8월 초에 가장 많이 여름휴가를 떠난다. 학원ㆍ유치원ㆍ어린이집이 대부분 이 무렵에 방학을 하기 때문이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국교통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오는 27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전체 휴가객의 47%가 몰릴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이때는 굳이 바가지 요금이 아니더라도 모든 피서지의 콘도나 펜션 등 숙박시설들이 극성수기 요금을 받는다. 방 구하기도 어렵고 고속도로 정체도 만만치 않다.
교통체증이나 비용 걱정 없이 멀리 떠나지 않고도 휴가를 즐기는 방법은 없을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다보니 정자(亭子)가 눈에 들어온다. 개울이나 소나무 숲 옆 정자에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보거나 시원한 수박화채를 먹을 수 있다면 멀리 가지 않아도 참 시원하겠다 싶다. 반질반질 윤기 흐르는 나무 정자에 앉아 시원한 산수화 그려진 부채를 부쳐가며 떠가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매미 울음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가족과 이야기를 나눠도 좋을 것 같다.
삼국유사에 임금이 정자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니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정자가 건축됐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재상 이규보는 '사륜정기(四輪亭記)'라는 글에서 '사방이 툭 트이고 텅 비고 높다랗게 만든 것이 정자'라고 썼다. 이규보는 정자에 필요한 도구로 책ㆍ베개ㆍ바둑판을 들었고 시 잘 쓰는 사람과 거문고 잘 타는 사람, 노래를 잘하는 사람, 바둑 두는 사람들이 정자에 함께 모여 즐기면 좋다고 적었다.
우리나라의 정자는 웅장한 건축물은 아니다. 그러나 숲이나 냇물, 강 등 주변 10리 자연 그대로의 전망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어주는, 자연합일의 전통적 건축관이 잘 나타나 있는 건축물이다. 마을 입구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반겨주는 정자나 풍광 좋은 산과 계곡에 지어진 정자, 궁궐이나 양반들의 별장에 지어진 정자 모두 한국적인 풍류를 즐길 수 있는 휴양시설이라 할 수 있다.
서울에서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정자를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는 창덕궁이 으뜸이다. 열 십자 지붕에 한 차례 각을 더 내어 멋을 더한 부용정, 부채꼴 지붕의 관람정, 창호와 툇마루가 있는 승재정, 천장이 독특한 존덕정, 초가 지붕을 인 창의정 등 창덕궁에서는 10개가 넘는 정자를 만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정자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고 싶다면 집 가까운 산에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 북한산이나 관악산 꼭대기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높이 340미터도 안 되는 종로의 인왕산이나 300미터에 못 미치는 서대문구 안산에도 편안한 정자가 있어 우리를 맞아 준다. 남산에도 정자가 있어 언제든 올라가 쉴 수 있다. 서울 한복판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산이 있고 정자가 있다는 건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자연과 소통하고 오가는 이들 아무나 다리 쉼을 할 수 있도록 정자를 지었던 조상들의 풍류가 한여름 피서를 위해 멀리 가기 고달픈 후손들에게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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