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가 악화하면서 유럽의 다국적 기업들이 남몰래 미소를 짓고 있다. 경기침체로 유럽 내 기업환경이 나빠지고 있지만 유로존 내 매출 비중이 낮은 다국적 기업들은 유로화 약세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이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유로존 시장에 크게 의존하는 기업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13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최근 유로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자동차ㆍ명품ㆍ항공우주산업ㆍ제약산업 등 수출 비중이 높은 분야의 유럽 다국적 기업들이 최대 수혜자로 떠오르고 있다.
유로화 가치는 2ㆍ4분기 중 달러화 대비 5%나 떨어졌으며 지난해 6월 이후 13% 가까이 하락한 상태다. 유로화는 일본 엔화와 중국 위안화, 영국 파운드화에 대해서도 지난 1년 동안 10% 이상 가치가 떨어졌다.
이처럼 유로화 약세가 지속되자 환율효과로 혜택을 보는 유럽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다. 전체 매출의 75%를 유로존 이외 지역에서 벌어들이는 프랑스 제약업체 사노피의 경우 2ㆍ4분기 매출액이 전년동기 대비 6.2% 늘었다. 환율효과를 배제하면 사노피의 매출 증가율은 0.4%에 그친다. 이탈리아의 선글라스 제작업체 룩소티카도 유로화 약세로 2ㆍ4분기 매출액이 전년동기 대비 15% 늘어났으며 독일 가전업체인 지멘스는 이 기간 매출이 전년동기 대비 10% 증가한 195억유로를 기록했는데 이 중 절반은 환율효과 때문으로 분석됐다. 유로존 국가는 아니지만 자국 화폐인 프랑이 유로화에 연동돼 있는 스위스 명품업체 리치몬드그룹도 수혜 대열에 동참, 상반기 순이익이 전년동기 대비 40%나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같은 환율효과는 특히 독일 자동차 업체들에 집중되고 있다. BMW의 경우 유로화 약세 덕분에 올해 연간 수천억유로 규모의 수익증대를 기대하고 있으며 다임러도 올해 환율로 인한 매출증가가 6억~7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 1위 자동차 업체인 폭스바겐은 유로화 약세에 힘입어 상반기 영업이익이 5억유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크레디트스위스의 아른트 엘링호르스트 애널리스트는 "유로화 약세는 단기적으로 이미 뛰어난 실적을 보이고 있는 독일 자동차 업체들을 더욱 유리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 자동차 업계에서 누리는 환율혜택이 올해 16억유로 규모에서 내년에는 38억유로까지 확대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하지만 모든 기업들이 유로화 약세의 혜택을 보는 것은 아니다. 전체 매출에서 유로존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수출기업이나 부동산ㆍ소매ㆍ수도ㆍ전기ㆍ통신사업 등 내수업계는 재정위기의 충격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는 실정이다.
자동차 업계에서도 유럽 내 판매 비중이 75% 이상인 프랑스 푸조와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유럽 자회사 오펠은 연일 적자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의 장 미셸 카라욘 신용정책팀 부사장은 "유로화 약세가 일부 기업들에는 줄어든 수요를 상쇄하는 효과를 낼 것"이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유럽 기업들에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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