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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10주년 청계천, 흘러흘러 서울 도심의 쉼터가 되고… 띄엄띄엄 놓인 다리는 역사를 품었네

청계광장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복원 청계천과 인근 건물들의 모습. 앞에 보이는 다리가 첫 다리인 모전교다. 많은 시민이 가을을 만끽하고 있다.

청운동 자하문고개 아래에 있는 ''청계천 발원지'' 표지석. 표지석에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쪽으로 약 150m 지점에서 청계천이 시작된다고 적혀있다.

광통교 아래에 특이한 무늬가 보인다.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인 ''정릉''의 석재라고 한다.

청계천 물이 한양도성 밖으로 흘러나가던 ''오간수문''이 있던 자리에 오간수교가 세워져 있다.

과거 청계천 인근에 흔했던 판자촌을 재현한 체험관. 뒤에 있는 것은 ''청계천문화관''이다.

청계고가도로의 교각 중 일부를 철거하지 않고 남겨 청계천 역사를 다각도에서 기억하게 했다.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 4대 산에서 물이 모이는 곳

조선왕조의 탄생도 함께 해

수위측정 水標 세워둔 '수표교'

국왕 행차 길에 놓인 '광교' 등 많은 역사적 기억들 간직

고가도로의 흔적 '존치교각' '판자촌'은 옛시절을 추억케


서울 청계천이 복원돼 다시 흐른 지가 10년이 됐다. 40년 이상을 어두컴컴한 복개도로 아래 있었던 청계천은 3년의 복원공사 후에 지난 2005년 10월1일 시민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거대한 콘크리트어항'이라는 비난도 받았던 복원 청계천은 새들이 놀고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시민들의 여가·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이번주에는 서울의 도심을 흐르는 젖줄이자 역사와 문화의 현장인 청계천을 다녀왔다.

◇청계천을 알면 서울이 보인다='강이면 비슷비슷한 강이지, 청계천이라고 뭐 다를 것이 있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청계천은 훨씬 특별하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면 이 청계천 때문에 지금의 서울(조선의 한양)이 탄생할 수 있었다.

한반도 중부지방의 강들은 대부분은 동에서 서로 흐른다. '동고서저'라고 동쪽 태백산맥이라는 반도의 등뼈에서 물길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뭐 작은 하천이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청계천은 아래쪽의 한강과 대비돼 묘한 느낌을 줬다. 조선왕조를 건설한 주역들에게 청계천 지역이 풍수지리적으로 특별하다는 인상을 남긴 것이다.

여기에 백악산(북악산)과 목멱산(남산) 사이가 한 나라의 수도로 떠오르게 된다. 원래 한양은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으로 둘러싸이고 가운데 청계천이 흐르는 지역에 설정됐다. 이 4개의 산이 둘러싼 지역, 즉 한양도성의 안쪽의 한가운데를 청계천이 흐른다. 이 지역은 속이 움푹한 분지여서 모든 물은 가운데로 모이게 되고 이것이 청계천이 되는 형태다.

즉 주요 궁궐이나 주택들도 '배산임수'의 원리에 따라 산(북악산)의 남쪽과 강(청계천)의 북쪽 공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경복궁과 창덕궁이라는 궁궐이고 북촌과 서촌의 한옥마을이다.

◇청계천을 걸으며 역사를 만나다=하천인 청계천을 사람들이 건너기 위해서는 자연적으로 교량이 필요했다. 현재의 복원된 청계천을 기준으로 역사상 중요한 다리를 살펴보면 광교·수표교, 오간수교 등이 있다.

광교는 경복궁에서 남대문으로 나가는 간선도로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로사거리에서 동아미디어센터, 시청 앞,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세종대로'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 한양의 설계자들은 풍수상 관악산의 불(火) 기운이 경복궁으로 직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길을 한번 꼬았다. 간선도로는 광화문광장에서 동쪽으로 종로길을 따라갔다가 지금의 보신각에서 꺾여져 남쪽으로 진행됐다. 이때 건넌 청계천 다리가 바로 광교다. 청계천에 놓인 다리 중에서 국왕이 가장 많이 이용했을 다리다.



수표교도 중요하다. 수표교는 위치상으로 한양도성 안의 가운데다. 한양도성의 주요 물길이 이곳으로 흘러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水標)를 세워뒀다. 그래서 이름이 수표교다. 국왕의 입장에서도 영희전(지금의 중부경찰서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이 수표교를 건너야 했다. 영희전은 역대 왕의 초상화를 모아둔 것으로 종묘에 버금가게 중요했다. 수표교는 원형 그대로 현재 남아 있는 청계천의 유일한 다리다. 다만 다리 자체는 청계천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쫓겨나 지금도 그곳에 있다.

오간수교는 한양도성이 끝나는 곳이다. 원래는 위쪽으로 성곽이 지나가고 아래에 물을 빠져나가는 5개의 구멍 '오간수문'이 있었다. 지금은 그냥 다리이고 난간이 성곽 모양인 것이 다른 다리하고 차이라면 차이다. 뭔가 아쉬웠던지 오간수교 옆에 옛 '오간수문' 모형이 복원돼 있다.

다리 자체는 아니고 다리 아래에 특이한 조각이 숨어있는데 바로 광통교다. 원래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 '정릉'에 있던 조각이다. 정릉은 원래 중구 정동에 있었는데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이 승리한 후 이 무덤을 성밖(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전하고 남은 석재로 광통교를 만들었다.

청계천은 현대의 서울에서도 핵심이다. 그만큼 역사적 기억을 많이 갖고 있다. 수표교 바로 서쪽에 있는 삼일교는 현대 청계천의 상징이다. 바로 인근 삼일빌딩에서 과거 청계고가도로가 시작됐다. 삼일빌딩이 처음 세워졌던 지난 1970년에는 31층짜리 이 건물이 서울에서 최고 높은 건물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삼일교라고 붙였다.

오간수교 바로 서쪽 버들다리에는 전태일 동상이 있다. 인근에 평화시장·동대문시장이 있는 상공업지대 한가운데 이 동상이 있다. 청계고가도로의 흔적은 동쪽으로 한참 가서 비우당교와 무학교 사이에 있는 '존치교각' 3개에서 찾을 수 있다. 전쟁의 폐허처럼 나란히 서 있는데 이것도 역사다.

과거 청계천 복개도로의 끝 부분이었던 고산자교 인근에는 청계천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청계천문화관'과 판잣집 테마촌이 있어 어려웠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완전한 '복원'을 꿈꾸다=우리 선조들의 청계천에 대한 대처는 바로 도전과 응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이 서울(한양)을 수도로 정한 14세기 말 청계천은 자연하천 그대로 흘렀을 것이다. 4개 산의 물이 한군데로 모여 어지러웠을 것이다. 조선왕조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강바닥을 파거나 둑을 높이고 물줄기를 직선화해 나갔다. 이를 통해 조선말까지 20여개의 물길로 정리됐다.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구조가 복잡해지면서 강을 복개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흐르는 오폐수를 그냥 덮으려는 생각도 있었다. 주요한 복개시도는 19세기 구한말 때부터 상류를 시작으로 시도됐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7년까지 복개를 완료하고 고가도로까지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의 청계천이다.

복원은 2003년부터 시작해 3년이 걸렸다. 그리고 2005년 10월1일 현재의 청계천이 재탄생했다. 현재의 모습이 완전한 자연 그대로의 청계천은 물론 아니다. 광화문광장 앞 동아미디어센터 부근에서 콘크리트 수로를 만들고 여기에 한강 수돗물을 계속 붓고 있는 식이다. 나머지 수많은 청계천 지류들은 여전히 도로나 건물 아래에 잠들어 있다.

정부는 장기적으로 4대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를 청계천 본류와 연결시킨다는 계획이다. 그때쯤이면 서울의 모양도 달라질 것이다. 덧붙여 북악산과 인왕산 자락이 만나는 자하문 아래에 '청계천 발원지'라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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