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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의 '모비 딕(白鯨ㆍ흰고래)'은 19세기 상상력에 정점을 찍은 가장 위대한 미국 소설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거대하고 흉포하지만, 섬세하고 정교한 이 작품의 매력은 수세대의 걸친 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고 혼란에 빠뜨리고, 심지어 좌절시키기까지 했다
신간 '모든 것은 빛난다'의 저자인 세계 철학계의 거장인 휴버트 드레이퍼스 캘리포니아대 교수와 숀 켈리 하버드대 교수는 '모비 딕'을 개인과 신이 벌이는 장엄한 투쟁으로 해석한다. 흰 고래는 무한대의 힘을 감추고 있지만 얼굴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같은 존재다. 반면 에이해브 선장은 자신의 다리(자신의 실존)를 물어뜯은 존재를 정복함으로써 자신을 완성시키려는 인물이다. 영웅적인 개인과 기독교적 유일신의 싸움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배와 선장이 함께 침몰함으로써 파국을 맞는다.
저자들은 '모비 딕'의 또 다른 주인공 이슈메일에 주목한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언제든지 자신의 입장을 변화무쌍하게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슈메일은 유일신의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다양한 문화적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감성의 소유자로서 현대 사회에서 사라져 가는 존재라는 게 저자들의 판단이다.
저자들은 현대인이 놓여 있는 실존적 상황, 즉 지극히 허무하면서도 우울한 시대적 병증은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그릇된 신념이 가져온 결과라고 주장한다. 개인이 어떤 외적 강제도 없이 스스로를 책임지고 자유와 행복을 구가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데카르트와 칸트, 그리고 프랑스 인권 선언 이후 인류가 얻어낸 가장 값진 가치라고 모두 알고 있지만, 저자들은 이런 신념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저자들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 단테의 '신곡',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서양 고전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 내려간다. 고대에는 개인 각자가 성스럽고 빛났던 삶이 어떻게 이렇듯 창백하고 우울한 피로 사회로 떨어져 버렸는지 찬찬히 들여다 본다. 그리고 현대 사회 허무주의의 주범은 다양한 의미의 생산지를 하나의 원천으로만 응집시키려 한 서양 사상이라고 지목한다.
그런 점에서 유일신의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채 고대의 '다신적(多神的)' 사고를 갖고 있는 '모비 딕'의 이슈메일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존재다. 결국 저자들은 다신(多神)에 열려있는 태도로 의미를 발견하며 사는 삶을 얘기한다.
저자들은 다신적 사고는 퓌시스(physisㆍ그리스어로 '자연'을 의미)라는 세계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삶의 매 순간마다 퓌시스를 경험하고 있지만, 거칠고 일시적인 힘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히틀러의 위험한 선동 같은 유혹에 빠질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포이에시스(poiesis)라는 고도의 양육적인 기술을 갖춰야 한다. 원래 예술적 '창작'과 '제작'을 의미하는 포이에시스는 장인이 갖춘 기예처럼 숙련되고 안목이 높은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저자들은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퓌시스의 계기들을 포이에시스로 함양함으로써 삶의 의미들을 성스럽게 가다듬고 균형감 있게 만드는 메타-포이에시스(meta-poiesis)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대가로 안게 된 홀로서기라는 짐, 이성의 거침없는 행진이 닦아놓은 무미건조하고도 무자비한 길, 남김없이 설명되고 통제되는 현대 사회의 생기 없는 얼굴 등등. "우리가 겪고 있는 허무와 우울의 시대적 병증은 결국 고대와 중세보다도 못한 역사의 퇴보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광포한 감정의 선동이나 차디찬 이성의 명령 어느 한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지키는 기술을 연마함으로써 진정 빛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그런 바람을 담아 책 제목도 '모든 것은 빛난다(All Things Shining)'고 정했다. 1만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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