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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가 백혈병 발병 근로자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전향적인 보상책을 마련하기로 한 것은 반도체 공정과 직업병의 인과관계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난치병에 걸려 투병 중이거나 사망한 직원들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특히 기업체질과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마하경영'을 가속화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백혈병 문제를 끌고 가서는 안 된다는 고민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의 전향적인 보상의지와 관련, 기업이미지 쇄신, 경영혁신 가속화 외에 경영권 승계를 위해 걸림돌이 되는 문제들을 해소하자는 의미도 내포돼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소송 관여 철회 등 예상 밖 전향 대책 내놔=삼성전자는 이날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전향적으로 인정했다. 권오현 부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삼성전자가 성장하기까지 수많은 직원들의 노고와 헌신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고통을 겪은 분들이 계셨다"며 "정말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라고 밝혔다. 또 "이 분들과 가족의 아픔과 어려움에 대해 저희가 소홀한 부분이 있었다"며 "진작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했다.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근무하다 산업재해로 의심되는 질환으로 투병 중이거나 사망한 직원들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한 것이다. 삼성전자 경영진이 백혈병 문제와 관련해 공식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반도체 생산 공정과 백혈병 발병과의 인과관계는 인정하지 않았다. 백혈병이나 유방암 등이 발병한 근로자가 산업재해 판정을 받았지만 삼성전자는 "반도체 공정과 백혈병은 무관하다"는 미국 인바이론사의 조사 결과를 근거로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인용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장은 반도체 공장 근무와 백혈병 인과관계를 인정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며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하는 게 옳지 않다"고 말을 아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요구사항은 모두 수용했다. 공식 사과가 이뤄졌고 당사자와 가족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기로 했다. 제3의 중재기구를 통해 보상 기준과 대상이 정해지면 따른다는 입장이다. 또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기관을 통해 반도체 사업장의 안전보건 관리 현황 등에 대한 진단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하기로 했다. 특히 발병 당사자와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산재 소송에서 보조참가 형식으로 관여해온 것도 철회하기로 하는 등 가족 등의 제안내용보다 한발 더 나아간 전향적인 대책을 내놓았다. 이와 관련해 삼성 관계자는 "그동안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고민해온 것을 터놓고 해결해보겠다는 것"이라며 "할 수 있는 것은 다하겠다"고 말했다.
◇마하경영, 경영권 승계 걸림돌 제거 해석도=삼성전자의 이 같은 전향적 입장 변화는 삼성전자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온 백혈병 문제를 해결하고 체질변화를 가속화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해부터 사업구조 재편과 계열사 간 지분매각이 빠르게 진행되는 등 경쟁력 강화와 지배구조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지난달 14일 이 문제와 관련해 조만간 경영진이 공식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발표할 때도 삼성이 사업구조 재편과 함께 기업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경쟁력과 무관한 사회적·정치적 이슈를 해소하는 작업에 착수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특히 이건희 회장이 해외 경영구상을 마치고 돌아온 뒤 이달 초 삼성 미래전략실 임원을 삼성전자로 전진 배치하는 '현장 경영'을 강화한 것도 백혈병 논란과 같은 현안을 조기에 해결하고 마하경영에 속도를 내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일각에서는 3세로의 경영권 승계를 앞두고 그룹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슈는 매듭 짓고 가겠다는 의도가 깔린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올 초 황유미씨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개봉돼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국회에서 심상정 의원 주도로 결의안 발의가 추진되는 등 정치·사회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압박 수위가 높아진 것도 삼성의 입장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삼성전자가 당초 제안한 내용보다 진일보한 입장을 내놓음에 따라 보상과 재발방지 등을 위한 협상이 급물살을 탈 것으로 예상된다. 심상정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예상했던 것보다 한층 진일보한 입장을 내놨다"며 "가족과 반올림의 입장을 보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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