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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5월3일] 5월3일의 학살
입력2006-05-02 18:35:10
수정
2006.05.02 18:35:10
나폴레옹의 형이 국왕으로 온다는 소식에 마드리드가 들끓었다. 혁명의 사도라고 믿었던 프랑스군의 압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터. 항거하는 스페인 민중을 프랑스군은 총칼로 짓밟아 시민 400여명이 희생됐다. 화가 고야는 이를 고스란히 화폭에 담았다.
고야가 남긴 ‘1808년 5월3일의 학살’은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전하고 있다. 두 팔을 벌리고 총살형을 맞이하는 흰색 상의를 입은 남자의 손바닥에 못 자국이 보인다.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는 듯하다. 반대편 사형 집행자들은 양심의 가책 탓인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총검을 들이대고 있다.
고야의 그림은 경제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프랑스군이 스페인에 진주한 배경은 대륙봉쇄령. 나폴레옹이 영국의 목줄을 죄기 위해 단행한 경제적 봉쇄조치는 거꾸로 영국의 배를 불린 반면 유럽 대륙의 물자부족을 야기했다. 수요는 공급을 낳게 마련. 밀수가 뒤따랐다. 분노한 나폴레옹은 밀수의 중심지이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군대를 보내고 결국 학살극까지 벌어졌다.
스페인의 저항은 나폴레옹 몰락의 서곡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ㆍ영국의 연합군은 1814년까지 계속된 ‘반도전쟁’에서 소부대 기습전략으로 나폴레옹의 30만 대군을 무찔렀다. ‘게릴라(Guerrilla)’라는 용어도 이때부터 쓰였다. 소부대를 지휘했던 영국군 웨즐리 준장은 ‘웰링턴경’이라는 작위를 받으며 영웅으로 떠올랐다. 나폴레옹은 훗날 ‘스페인의 궤양이 나를 괴롭혔다’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브라질의 독립도 비슷한 시대적 배경을 공유한다. 나폴레옹에 쫓겨 브라질 식민지로 피신했던 포르투갈 왕실이 본국으로 귀국할 때 홀로 남았던 왕세자는 1822년 ‘독립이냐 죽음이냐’를 외치며 브라질 독립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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