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심성에 대해 한발 더 나아간 사람들도 있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과 철학자 쇼펜하우어 역시 ‘네가 바로 그것이다’와 ‘도덕의 기초’에서 그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타인의 고통에 즉각적인 반응과 행동을 하는 것은 ‘네가 그것’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형이상학적 깨달음이 섬광처럼 지나간 결과”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을 전제한다. 말하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힌 벽이 뚫려 타인이 더 이상 무관심한 낯선 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의 피부 밑에 나의 신경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안에서 내가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수영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보면 불현듯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구걸하는 걸인을 보면 선뜻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을 꺼내 들게 되는 경우도 있다. 물에 빠진 사람 혹은 걸인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보이는 일종의 착시현상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캠벨이 말한 ‘네가 그것이다’의 의미다. 심리학적으로는 ‘동일시’ 혹은 감정의 ‘투사’라 할 수 있을 테다. 인간 심성의 근원에 대한 신화학자와 철학자ㆍ과학자ㆍ사회과학자의 탐구와 연구 결과가 대체로 그러하다. 한결 같이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상호부조의 정신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대한민국 정부와 경찰은 앞선 연구자들의 설명을 비웃는 듯하다. 용산 참사와 관련한 그들의 폭력과 거짓으로 점철된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새삼 국가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분노가 기어오른다. 국가는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이다. 그러나 용산 참사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와 검찰과 경찰의 행태를 보라. 진상규명을 외칠 뿐 정부가 해야 할 기본적인 조처와 도리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참사의 원인을 논하기 이전에 6명이나 되는 고귀한 생명을 앗아간 사건에 대해 정부 차원의 대(對)국민 사과와 유족들에게 최소한의 조의라도 표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건 발생 보름이 지나도록 정부와 경찰은 앵무새처럼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진상조사에 나선 검찰은 한술 더 떠 파행과 편파수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수박 겉 핥기식 수사결과 발표로 유족과 시민들의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약자보호가 민주주의 기본정신
국민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국가의 정책은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국민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법과 질서’도 있을 수 없다. 생명보다 조직의 위계를 더 중하게 여기는 집단이라면 그건 ‘조폭’에 다름 아니다. 국민의 생명을 해치면서까지 지켜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문득 파블로 네루다의 절규가 떠오른다. “모든 꽃들을 꺾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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