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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연극 '이영녀'

빈곤·사회폭력에 짓밟힌 한 여인의 잔혹사

비운의 극작가 김우진 미발표 유작… 국립극단이 90년만에 무대 올려

생계 위해 몸 파는 여성 통해… 1920년대 하층민의 한서린 삶 조명


난파·산돼지 등을 남긴 한국 표현주의 희곡의 선구자이자 연인 윤심덕과의 가슴 아픈 사랑으로 현해탄에 몸을 던진 비운의 극작가 김우진. 그의 미발표 유작 '이영녀'가 90년 만에 연극 무대에서 부활했다. 김우진이 죽기 1년 전인 1925년 탈고한 이 희곡은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여인(이영녀)을 통해 1920년대 하층민 여성의 곤궁한 삶과 사회의 폭력 등 당시 시대가 직면했던 문제를 사실적으로 조명한다. 1975년 발굴·소개된 후 정식으로 공연된 바 없는 이 작품은 국립극단이 지난해 시작한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게 됐다.

연극은 원작의 불친절함을 최대한 살려낸다. 3막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막과 막 사이 원고의 일부가 찢겨나간 듯 단절돼 있다. 1막은 매춘으로 경찰서에 불려가는 영녀의 모습으로 끝나지만, 2막은 동네 유지 강참사 집 하인 소개로 시작하는 식이다. 감옥에 갇힌 영녀가 교화 노동을 위해 강참사 집에 머물게 된 사연은 해설자의 설명으로 짧게 처리될 뿐이다. 이야기 전개도 주인공 영녀가 아닌 영녀의 포주 안숙이네와 강참사 집 하인, 인력거꾼 기일과 그의 처 등 조연의 대화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영녀는 극이 시작되고 20여 분이 지나서야 등장하고, 어느 순간 주변 인물의 대화 속에 배경으로 밀려난다.

이 구성의 불친절함은 그러나 돈도 믿음직한 남편도 없이, 자식만은 제대로 키워보겠다던 한 여인을 만나 비극을 극대화한다. 막과 막 사이 인과적으로 연결된 사건을 생략함으로써 영녀의 삶은 설명과 설득이 아닌 '보여주기'로 무대 위에 펼쳐진다. 전도된 주인공과 주변 인물의 비중은 시대와 환경이 한 여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드러내는 의도된 장치다.

불친절함이 빚어내는 비극은 결말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기일 처와 영녀의 딸 명순이 영녀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대화에 열중하고 그렇게 허무하게 조명이 꺼지는 순간, 허를 찌르는 잔인함은 무대와 객석을 짓누른다.



강인하면서도 한 서린 영녀 역을 소화한 배우 이서림의 절제된 연기가 돋보이는 가운데, 창고에 쌓인 낡은 장롱을 영녀의 삶의 공간(목포 유달산 밑 빈민가 움막)으로 전환하는 감각적인 무대 활용도 인상적이다.

올해 국립극단을 아우르는 주제는 '해방과 구속'이다. 2015년 대한민국, 우리는 남성 중심적 사고가 지배하던 이영녀의 시대로부터 얼마나 해방되었을까. 새 시대의 가치와 폭력에 구속된, 또 다른 이영녀(들)는 없는 것일까.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이영녀를 무대에 올리며 "이 훌륭한 작품이 한국에서 한 번도 공연되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90년 전의 작품이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에 관객은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다. 31일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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