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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70> 도망가자, 보이지 않는 곳으로 上

이제 언제든 도망갈 수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어느 공간이든. /사진=morguefile.com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야반도주’(夜半逃走)라는 말이 많이 쓰였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거나, 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 사람들이 하는 ‘짓’쯤으로 해석되곤 했죠. 도망가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지금 보이는 이 세계에서는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으니까. 자기들끼리만 살아도 행복한 그곳으로 아무도 모르는 순간 ‘튀는’ 겁니다. 야반도주의 근원은 농경사회에서 시작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 수업을 들으신 분들은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라는 말을 기억할 겁니다. 막중한 세금부담 때문에 도망가는 가족이 많은 조선시대였습니다. 누군가가 마을에서 도망가면 나머지 가족이 연대책임을 무는 방식으로 이들을 강하게 묶었습니다. 결국 튀고 싶어도 다른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겨서 못 도망가는 심리를 이용한 겁니다. 다른 네 가족들도 서로 의심하면서 이웃이 야반도주를 하지나 않을까 감시하고 살피게 됩니다. 결국 도망을 가려면, 얼굴에 철면피를 깔아야 했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도망갈 수 있습니다. 지금 사는 곳을 버리거나 다른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도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 배경이 바로 ‘인터넷’ 입니다. 페이스북에 한 번만 접속해도 ‘알 듯 말 듯한 사람’과 ‘확실히 아는데 연락 안 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익숙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쉽게 도망갈 수 있는 진지가 확보된 겁니다. 게다가 스마트폰도 급속히 확산됐습니다. 이전에는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면 엄청난 사용료를 물어야 했지만, 지금은 큰 부담없이 검색과 다운로드를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모바일 컴퓨터가 모든 사람들의 손에 떨어진 겁니다. 이제 이 무시무시한 무기를 가지고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세상으로 도망갑니다. 불륜 상대를 만나기도 하고, 잘 모르는 익명의 사람들과 음험한 거래를 실시간으로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어디 가서 번거롭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 않아도, 자유롭게 내 소속을 떠나 다른 동네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제, 누구나 ‘야반도주’를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누군가가 카톡 화면을 캡처해서 SNS에 버젓이 올린다거나 친구들에게 보여주면서 뒷담화를 까는 엄청난 일만 저지르지 않으면 말이죠.

어디로든 도망갈 수 있는 세상 이야기를 하면서 한번 읽어봐야 할 철학자가 있습니다. 질 들뢰즈라는 사람입니다. 철학자, 작가, 영화감독, 화가 등 그를 존경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 본인도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작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가 내놓은 만물박사라는 이 사람은 인간이 제정신이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차피 누구나 정신분열증을 겪는다는 겁니다. 도망가자는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한데, 우리가 모두 정신병자라며 엄청난 말들을 쏟아놓았습니다.

왜 우리가 근원적 정신병자일까?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인간은 ‘차이’에서 시작한다는 겁니다. 들뢰즈 이전까지 철학자들은 사람과 사람이 비슷하거나 같다는 전제가 확보되어야만 다름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봤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편안하게 느낍니다. 그리고 나와의 동질성을 찾아가기 위해 다양한 주제들을 던집니다. 그러나 들뢰즈의 입장에서 보면 그건 서로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비슷한 점을 발견해 나가는 게 재미있을 뿐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해지지 않기 위해서 동질감이 갈만한 주제를 일부러 던집니다. 그렇지만 서로 소통하는 기본 전제는 큰 그룹에서의 당신과 1:1로 이야기하는 당신은 엄연히 다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똑같으면 일부러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겠죠. 적어도 매력적인 이성이라는 사실을 피력하려고 해도 ‘다르게’ 보여야만 합니다. 인간은 차이에서 매력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서로 다름이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르게 보이는 데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요. 뻔해집니다. 서로 시간을 내고 일부러 그룹에서의 대화를 이탈하면서 새로운 담론을 나눌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됩니다. 마치 장기간 연애를 한 커플들이 사실혼 관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단 10분을 이야기해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느낌이 든다면 상대방에 대한 설렘이 사라집니다. 설렘은 동질감과 차이의 경계에서 서로를 찾아간다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은 온라인 세상이긴 하지만 현실과 비슷한 공간입니다. 일단 사진도 다 보고, 그 사람의 아는 사람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도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형태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오픈 네트워크(Open network)’ 또는 ‘전체 네트워크(Whole network)’ 레벨의 서비스라고 말합니다. 지도를 펼쳐놓듯이 서로의 관계를 관찰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죠. 들뢰즈의 입장에서 보면 서로의 차이와 비슷함을 굉장히 현실적이면서 수리적으로 잘 표현해 놓은 서비스인 셈입니다. 결국 이러한 온라인 공간이 인기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도망가고 싶은’ 심리를 잘 충족해주기 때문은 아닐까요. 한 번쯤 곱씹어볼 만한 대목입니다.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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