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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한 생활패턴/오찬식 소설가(로터리)
입력1996-10-14 00:00:00
수정
1996.10.14 00:00:00
오찬식 기자
권세를 등에 업은 부정축재자는 예부터 끊임 없었던 시지프스였을까. 이에 말려들지 않은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현인의 슬기라 우러른다.글 잘하고 풍채가 뛰어난 신익성은 글씨까지 잘썼기로 임금의 사위가 된다. 무릇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권세가는 말할 것도 없을 뿐더러 토호집안의 사위를 마다할리는 없다. 한데도 조선왕조시절에는 임금의 사위만은 자청하지를 않았다. 가난한 선비에게는 신선놀음이나 진배 없겠지만 명문대가 귀족들한테는 성가시고 귀찮은 굴레였다.
그것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벼슬자리인데도 부마도위는 그 자격이 주어지지 않아서였다. 자격이 없으니까 자연 무위도식이나 일심으며, 평생 거문고나 뜯으며 술과 함께 허송세월을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거기에다 옹주나 공주가 살아 있을 적에는 첩을 둘 수 없을뿐더러 상처를 한다 해도 재혼할 수가 없으니, 후사가 끊겨도 어쩔 수 없는 국법이었다.
이러한 제약이 뒤따르는 데에도 임금이 한번 점찍은 사위는 하는 수없이 어명을 좇을 수밖에 없었다.
선조임금 셋째딸인 정숙옹주의 부마가 된 신익성은 이러한 제도의 제약 속에서도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을 여느 부마와 달리 잘 피하면서 살았다. 이는 오로지 검소한 평소 신익성의 생활신념 때문이었다.
당시 옹주의 어머니는 인빈 김씨였으므로 선조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탓에 호화롭게 살 수도 있었다. 그랬으나 노상 신익성의 추상같은 반대에 부딪쳐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마 또한 정승을 지냈던 아버지 신흠이었으나 집안살림은 마냥 검소했다.
견디다 못한 옹주가 한번은 거처하는 집이 비좁다고 부왕에게 하소연하였다. 했는데도 선조임금은 사위 신익성의 성격을 잘아는지라 매정하게 잘라맸다.
『소리를 낮게하면 들리지 아니할 것이고 처마를 얕게 하면 보이지 아니할 게 아니냐. 굳이 앞집을 사서 뜰을 넓혀야겠다니, 될법이나 하느냐. 사람의 거처는 무릎만 들여놓으면 족할 것이야』하면서 굵은 발 두벌을 내려 주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검소한 생활로 해서 신익성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에도 권세를 업은 부정축재자로 몰리지 않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귀감이 현대에도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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