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업경영이 최근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위기대응형'으로 옷을 갈아 입고 있다. 최근 삼성에버랜드는 건물관리업을 보안업체인 에스원에 양도하는 결정을 내리고 앞서 제일모직이 패션사업 부문을 삼성에버랜드에 넘긴 것도 삼성의 후계구도를 미리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이뤄진 조치로 일종의 위기대응이라는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과 SKㆍLG그룹 등 주요 그룹들이 공히 연구개발(R&D) 투자를 확대하는 것 역시 급변하는 시장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들이 시설투자는 소폭 늘리거나 전년 수준을 유지하는 반면 R&D 시설 및 인력 투자에는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면서 "위기대응을 위해 기업들이 추가적인 신사업 진출은 꺼리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5일 재계 및 삼성경제연구원 등에 따르면 저성장 고착화, 글로벌 위기 상시화 등으로 국내 기업들의 경영패턴이 리스크 메니지먼트로 확연히 바뀌고 있다. 일회성 위기경영을 떠나 경영의 핵심 테마로 상시적 위기관리를 전면에 내세우며 경영 전반 시스템을 이에 맞춰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성장은 한자릿수든, 두자릿수든 계속 커가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며 "문제는 글로벌 금융위기, 국내외 경영환경 변화 등 여러 요인을 고려해볼 때 리스크 관리 없는 성장은 자칫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위기 대응형으로 기업경영 변모는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인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CEO 교체를 최대한 지양하고 전문성 있는 경영자를 발탁하는 게 그것이다. 위기시에는 조직의 안정과 전문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국내 기업들의 CEO 교체 비율(543개사 조사)은 2004~2008년 평균 20%대로 글로벌 기업(2,500개사 조사)의 14%대보다 높았다. 잦은 경영자 교체를 통해 급격한 변화를 추구해왔던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CEO 교체 비율은 2012년 기준 17.1%로 글로벌 기업(15.0%)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CEO의 전문성 역시 과거와 다른 변화다. 리스크 관리에서는 전문성에 기인한 신속한 의사 결정이 무엇보다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학력ㆍ출신보다는 동종 업계에서 오랜 경험을 가진 CEO가 부상하고 있다. 실제로 월간 현대경영 조사에 의하면 최근 100대 기업 CEO의 76%가 20~40년간 동종업계에서 한 우물을 판 CEO다.
의사 결정의 투명성 강화도 위기 경영의 큰 흐름 가운데 하나다. 재계 관계자는 "외부의 감시와 견제가 강화되면서 투명성을 높이지 않으면 자칫 기업이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례로 삼성경제연구소 조사에 의하면 사외이사 비중이 2007년 36.8%에서 2012년 40.0%로 높아지고 있다. 아울러 유가증권 사장 업체 가운데 33.2%가 감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추가적인 신규 사업 진출 위축도 이 같은 흐름선상에 놓여 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삼성ㆍ현대차ㆍLGㆍSK 등 주요 그룹들이 앞다퉈 신사업 진출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현재는 발표한 신사업을 수행하고 있을 뿐 추가적인 대규모 새로운 영역 진출은 찾아보기 힘들다. 전경련 관계자는 "리스크 메니지먼트하에서 제일 최악은 신사업 진출에 따라 회사가 큰 손해를 입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기존 관련 사업 통합은 빠르게 늘고 있다. 추가 신규 사업 진출이 아닌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통합해 그것을 통해 수요를 창출하겠다는 뜻이다. 이를 위사업 양도와 합병이 최근 들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유동성 관리 강화와 R&D 투자 확대도 예외는 아니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의하면 최근 한국 제조기업 93%가 불확실성 등을 이유로 적극적인 유동성 관리 계획 의사를 밝혔다. 대표적인 것이 현금성 자산 확대다. 실제로 삼성경제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한국 매출 상위 500대 기업의 현금성 자산 비중이 2007년 5.56%에서 2012년 5.82%로 상승했다.
또한 시설투자는 정체를 보이는 반면 R&D 투자는 최근 1~2년 새 두자릿수 이상 성장하고 있는 것도 위기경영의 한 단면이다. 리스크가 큰 시설투자 대산 위험요인이 적고 성공시 큰 성과를 볼 수 있는 R&D에 주력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성과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직원들에게 정서적 동기부여 등을 확대하는 것도 최근의 흐름 중 하나다. 이 역시 리스크 메니지먼트의 일환으로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일환이다. 김성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기업들이 경영의 위기에 적합한 체제로 바뀌고 있다"며 "앞으로 상시적 리스크 관리가 더욱 보편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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