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주목을 끌었던 인물 중 한 명은 국감 증인으로 출석한 리처드 힐 한국스탠다드차타드(SC) 은행장이었다. 여야 의원들이 한목소리로 '고배당과 먹튀 논란'을 제기하며 질타했다. 몇 년째 되풀이되는 풍광이다.
2005년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이 제일은행을 인수한 후 지금까지 매각한 부동산만 5,000억원이 넘는다. SC는 제일은행에서 '곶감을 빼먹듯' 알짜 부동산을 매각하며 막대한 차익을 실현했다. 힐 행장은 "부동산 매각 자금 중 3,500억원가량을 정보기술(IT) 부문에 재투자했다"고 항변했다.
그렇게 갑론을박이 끝난 후 한 달이 훌쩍 지났지만 3,500억원의 진실은 다시 관심 밖으로 묻혀졌다. 의혹을 제기했던 의원 측도 해명을 하겠다던 SC은행 측도 모두 무관심과 무대응이다. SC은행의 '부동산 먹튀 논란'이 매년 국감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메뉴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조 섞인 지적이 나오는 상황이다.
◇먹튀?ㆍ재투자?…알 수 없는 3,500억원 행방=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영주 민주통합당 의원은 국감 당시 SC은행으로부터 2005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보유 부동산 매각 현황 자료를 제출 받았다. 자료에 따르면 SC은행은 7년여 동안 부동산 유동화 명목으로 4,380억원에 달하는 영업점 부동산을 매각했다. 통폐합 된 지점(352억원)까지 합하면 지난 7년 동안 차익을 실현한 규모는 4,700억원이 넘는다.
기업체가 유동 자금 확보를 위해 부동산을 매각하는 것은 정상적인 경영활동의 일환이다. 하지만 SC가 대규모 부동산 처분에 나서면서 영업점 숫자를 10%가량 축소한 행보는 과하다는 것이 금융계의 시각이다.
먹튀 논란을 뒤로하고 외환은행을 떠난 론스타조차도 10년간 외환은행 지점 수를 35개 늘렸다. 이 기간 론스타가 영업점의 부동산을 매각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시세 상승에 대한 기대감과 보유 부동산을 유동화해 임대 방식으로 전환할 경우 불필요한 비용 지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SC 측은 부동산 매각 자금 중 3,500억원가량을 지난해 IT 부문에 재투자했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실제 금융감독원도 2010년 SC은행에 대한 종합검사를 실시할 당시 '전산시스템이 노후화돼 시스템을 재구축하라'고 권고했다.
그럼에도 1~2년 사이 IT 부문에만 3,500억원을 투자했다는 주장을 쉽사리 납득할 수 없다는 말도 일리가 없지 않다. 전산시스템 현대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금융회사들이 연간 투입하는 비용이 대략 200억원 안팎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런 줄기에서 SC의 고액 배당과 부동산 자산 매각을 연결 지어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부동자산을 유동화하면 단 시일 내 당기순이익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오고 수치상으로는 수익이 난 만큼 (본사로) 배당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말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SC은행은 2009년부터 올해까지 금융지주로 네 차례에 걸쳐 모두 7,500억원을 배당했다. 이중 2,310억원이 영국 SC본사로 흘러 들어갔다.
◇다시 묻혀진 진실=3,500억원의 진실이 단시일 내 규명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국감 당시 김 의원 측은 "3,500억원을 IT 부문에 투자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힐 행장을 위증죄로 고발하겠다"고까지 말하며 날을 세웠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김 의원실 관계자는 "몇 차례 자료를 요청하기는 했지만 은행 측에서 자료 제출을 차일피일 미뤘다"며 "국회 예산편성 등 현안이 많아 제대로 신경을 못 쓴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은행 측 해명은 다르다. SC은행 관계자는 "피감 기관인 금융위원회에서 은행에 자료 요청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일이 없다"고 말했다.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되풀이됐던 것처럼 SC은행의 부동산 매각 자금에 대한 진실 규명은 이번에도 내년으로 미뤄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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