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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날 5,000억弗 시대 열었다] <수필공모/최우수상> ‘24-7-365’

김은숙 미국 조지아주 거주


‘호르르르륵’ 비명 같은 호루라기 소리가 새벽 정적을 갈랐다. 후다닥 몸을 일으켰지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에 곧 ‘딴따라딴’하는 음악소리가 이어졌다. 남편은 어느새 휴대폰의 폴더를 열고 있었다. “여보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아직 잘 시간 안됐는데요, 뭐…” 잠들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남편의 목소리에는 졸음이 잔뜩 묻어났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불빛에 비친 시계는 새벽 두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내 몸은 이런 일에 익숙해졌다. 미국 생활 17년 동안 10년은 상사 주재원의 아내로, 남편이 퇴직한 뒤에는 무역업자의 아내며 조역자로 살면서 진화라도 하듯이 몸이 환경에 맞추어졌기 때문이리라. 소파용 패브릭이 가득 실린 컨테이너 한 대가 부산항에 발이 묶인 것은 이틀 전이었다. 한국에 있는 공장과 수출업자가 혼신을 기울여 패브릭을 개발한 것이 1년쯤 전이고, 그 샘플을 받아 남편이 바이어를 찾아다닌 것은 작년 이맘때다. 1년이나 걸려 겨우 거래가 성사된 첫 번째 제품이 배에 실리기도 전에 말썽이 생긴 것이다. 이번 샘플은 처음부터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심혈을 기울여 개발하기도 했지만 시장 트렌드를 제대로 예상했고 원가도 낮게 맞추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1차 바이어인 디스트리뷰터들의 전언에 의하면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하이 포인트에서 열리는 연례 가구 쇼에 진열된 시제품을 본 2차 바이어들 즉, 가구 제조업자들의 반응이 선풍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랜 공을 들여 만들어진 제품에 클레임이 걸린 것이다. 클레임의 이유는 명확하고 간단했다. 품질과 색상이 처음 샘플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육안으로도 품질과 색상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이 새벽인 것을 알면서도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제품의 문제점은 바로 밝혀졌다. 너무나 오랜만에 공장을 풀 가동 시켜야 될 정도로 오더가 밀려들자 욕심이 생긴 공장장이 제조 마지막 과정인 드라이 공정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지 않은 것이 탈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공급한 다른 제품들의 품질을 믿고 오더는 계속하겠답니다.” 공장과 통화를 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떠있다. 웬만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의 얼굴이 붉은 홍조를 띠었다. “자신들도 이 제품을 포기할 수 없답니다. 그만큼 시장성이 있다는 것이죠. 바이어가 이 정도로 우리를 신뢰하는데, 지금까지 잘못 생산된 제품은 포기하고 앞으로 최선을 다합시다.” 물론 공장 쪽의 실수였지만 지금까지 생산된 제품의 수출을 포기하기엔 손실이 너무나 컸다. 하지만 그로 인해 앞으로의 오더를 포기할 수 없는 일인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일찌감치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한 만큼 공장 쪽에서도 각오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 많은 제품을 처분할 일이 막막한 건 사실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난 남편은 아홉시가 되자마자 디스트리뷰터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샘플과는 다르지만 팔 수 없을 정도의 물건은 아닙니다. 다른 업체들이 관심 있어 할 수도 있잖습니까?” 남편의 진심 어린 설득에 감복했는지 생각해보자던 디스트리뷰터들이 가격을 하향 조정해주면 팔아보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십여 통의 통화 끝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켜는 남편의 얼굴에 엷은 만족의 웃음이 베어난다. 나는 알고 있다. 그의 미소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일에 대한 성취감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어떤 보람으로 꿈틀대는 그의 감동을. “호르르륵” 호루라기 소리로 시작되는 남편의 휴대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아, 괜찮습니다. 언제든지 전화하셔도 됩니다. 무역하는 사람들의 전화는 원래 하루 24시간, 주 7일, 연 365일 통화 가능한 거 모르셨어요?” 오늘 새벽도 숙면을 취하기는 틀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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