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견우와 직녀가 있고 영국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듯이 할리우드에는 트레이시와 헵번이 있다. 할리우드 최고의 연기파들이었던 스펜서 트레이시와 캐서린 헵번(사진)은 껍질 속 완두콩처럼 둘이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할리우드의 전설적 한 쌍이었다. 지난 12일은 바로 헵번 출생 100주년. 서로 배경ㆍ성격ㆍ연기 스타일이 판이했는데도 트레이시와 헵번은 25년간을 같은 직업인이자 연인으로 서로를 극진히 존경하고 사랑했다. 나는 요즘도 둘의 영화를 보면 전혀 로맨틱보이지 않은 저 둘이 어찌 그렇게 불변의 사랑을 할 수가 있었을까 하고 의아해 지곤 한다. 오래 가는 사랑이란 로맨틱한 정열을 초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 동부 명문 가정에서 태어난 헵번은 명문대 출신의 자유혼을 지닌 매우 지적이요,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하던 여인으로 자신에 대한 타인들의 존경과 인정을 강요하다시피 했다. 1930년대 초 브로드웨이를 거쳐 할리우드에 진출해서도 당시로서는 파격인 바지를 입고 다녔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한편 밀워키에서 엄격한 가톨릭신자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트레이시는 반항적이어서 12번이나 퇴학을 당했다. 그는 대학생 때 신부가 되려고 준비를 할 만큼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다. 이런 둘이 배우가 돼 처음 만난 영화가 '올해의 여성(Woman of the Yearㆍ1942)'이다. 당시 헵번은 33세였는데 첫 눈에 유부남 트레이시를 좋아하게 됐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했다. 둘 다 의지가 강철 같고 할리우드 기준으로서는 과격한 트레이시와 헵번의 사랑은 가톨릭신자로서 이혼을 거부하는 유부남과 이혼녀의 스캔들성 사랑이었다. 그러나 집요한 가십 칼럼니스트들조차 둘을 인간적으로 존경해 이들의 이 공개된 비밀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스타일의 헵번이 트레이시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다는 것. 헵번은 트레이시와 함께 있을 때 때로는 그의 발치에 앉을 정도로 트레이시를 존경했다. 굉장히 힘든 사람으로 알려진 트레이시는 고주망태의 술꾼으로 별거한 아내 루이즈와 영원한 사랑 헵번 사이 내면적 갈등으로 인해 폭음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둘은 생애 총 9편의 영화에서 공연했는데 마지막 영화가 헵번이 세 번째로 오스카상을 탄 '초대 받지 않은 손님 (Guess Who's Coming to Dinnerㆍ1967) '. 영화 출연 때 중병을 앓고 있던 트레이시는 촬영이 끝난 2주 후 67세로 사망했는데 그가 영화에서 헵번과 나누는 대화는 각본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죽음을 앞둔 자신의 실제 마음을 전달하는 것으로 봐도 된다. 헵번은 생전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트레이시 죽음의 침상 옆에는 루이즈와 헵번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 헵번은 오스카상을 4번이나 타고 8번이나 후보에 오른 연기파다. 헵번은 트레이시를 만나기 전에 하워드 휴즈와 깊은 관계를 맺었는데 이런 내용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휴즈 일대기 '애비에이터(The Aviator)'에서도 자세히 묘사된다. 여기서 헵번역을 맡았던 케이트 블랜쳇이 오스카 조연상을 탔다. 헵번은 지난 2003년 6월 93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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