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금융가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돌았다. 일본계 자본이 국내 은행 인수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몸집이 작은 지방은행이 우선 타깃이며 인수 후 인터넷뱅킹 사업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꾸린다는 구체적인 설명까지 뒤따랐다.
이 소식을 접한 금융 당국은 서둘러 진위 여부를 캐봤다. 비슷한 루머가 돌고 있는 것은 확인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당국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은행들이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고 전했다.
이 사례에는 국내 은행들의 위기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금융산업의 빅뱅이 선사한 긴장감이다.
은행들을 이렇게 긴장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금융업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가지의 테마(환경) 때문이다. 당장 '은행 없는 은행'으로 표현되는 모바일뱅킹으로의 급속한 전환, 이 흐름에 맞춰 급격하게 공습해오고 있는 정보기술(IT) 업체의 금융업 진출, 여기에 우리은행 민영화 등 종래 금융업 안에서 이뤄지는 인수합병(M&A)을 포함한 하드웨어 변화, 마지막으로 최고경영자(CEO)들의 교체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한 시중은행장은 "은행업을 둘러싸고 변하지 않는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3년 안에 은행권의 서열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며 "상황에 따라서는 생존 자체에 위협을 느끼는 곳이 나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
◇IT 공습과 '은행 없는 은행'…'산업자본'의 벽도 무너진다=산업의 지형도가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면 가장 먼저 변화의 속성부터 찾아야 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변화의 실체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은행 없는 은행(본지 시리즈 참조)'이라고 지적한다. IT 발달에서 시작된 금융산업의 빅뱅은 위기이자 기회로 다가온다.
은행산업은 이미 새로운 적을 맞이했다. 뱅크월렛 카카오가 산업 생태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산업 지형도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금융 선진국에서는 이미 유통업체(테스코뱅크), 제조업체(소니뱅크), 편의점(세븐뱅크), 보험사(스칸디아뱅크) 등이 은행업에 뛰어들었다.
금융 선진국인 영국에서는 내년 초 아톰뱅크라는 디지털온리뱅크(Digital-only Bank)가 출범한다. 이 은행은 자금중개라는 금융 본연의 역할만 같을 뿐 은행 비즈니스에 필요한 전산은 외부로 위탁하는 등 운영원리가 지금까지의 은행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은행은 현재 국내 은행들의 고질병인 비용 절감, 오버뱅킹 등을 플랫폼만으로 극복했다. 글로벌 컨설팅사인 어센추어가 영국에서 실시한 조사 결과를 보면 디지털온리뱅크만 주 거래은행으로 사용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25%가 '그렇다'고 답했다.
급진전하는 모바일뱅킹의 틈을 비집고 IT 업체들은 금융을 새로운 부가가치 영역으로 삼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겨지는 공인인증서 문제만 해결되면 '인터넷뱅크' 등이 조기에 출현하고 산업자본에 대해 금융 소유를 금지하는 '규제의 성역'도 허물어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바라보고 있다. 전상욱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전략연구실장은 "새로운 시장 진입자들이 늘어나면서 은행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는데 은행업이 지닌 금융중개기능의 고유성을 더욱 약화시킬 것"이라며 "기존 은행업을 벗어난 금융중개기능은 발전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은행이 어떻게 새로운 역할을 정립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드웨어(민영화·통합)와 소프트웨어(지배구조) 확 바뀐다=은행산업의 격변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은행 수장들의 교체와 맞물리면서 변화의 속도는 더욱 가팔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6대 시중은행 중에서 향후 2년간 임기가 보장된 곳은 기업은행이 유일하다. 은행 수장들의 대거 교체는 은행권의 또 다른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된다.
그중에서도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은행은 변화의 시발점이다. 교보생명이 우리은행을 갖게 되면 '어슈어뱅크'라는 새로운 형태의 은행이 탄생한다. 새마을금고는 우리은행 인수를 통해 한국형 도이치방크를 꿈꾸고 있다.
하나은행과 외환은행 간 조기통합 가능성도 태풍의 핵이다. 프라이빗뱅킹(PB)과 외환 사업에 각자 강점을 지닌 두 은행이 합병할 경우 규모의 경제효과를 제쳐놓더라도 새로운 형태의 영업전략을 기대해볼 수 있다.
◇생존법은 차별화…색깔을 찾아라=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시중은행들의 총 자산 대비 단기운용비중은 지난 2007년 4.0%에서 2011년 5.4%로 늘어나더니 2013년 말에는 7.3%까지 확대됐다. 은행업 자체가 레드오션화된데다 가계부채, 기업자금수요 감소 등으로 영업자산 확대가 어려워지자 자금운용의 단기화가 급속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안전자산인 원화대출 비중은 꾸준히 늘어 2007년 60.3%에서 2013년 말 63.2%까지 확대됐다. 앉아서 돈 버는 사업에만 치중했다는 것이다.
국내에만 치중된 수익구조도 문제다. 지난해 말 현재 국내 은행 수익에서 해외 비중은 10.3%로 뱅크오브아메리카(13.7%), 미쓰비시(53.3%), HSBC(99.8%)에 비해 턱없이 낮다. 변현수 산업은행 조사분석부 파트장은 "대출 중심의 유사한 사업구조로는 수익 창출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며 "차별화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해야 쏠림현상에 따른 시스템 리스크를 축소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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