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87부터 다시 본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흑93이 두어지던 시점까지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의 징조는 없었다. 흑95로 98의 자리에 가만히 뻗었더라면 흑이 약간 우세한 가운데 계가바둑으로 갈 분위기였다. 그런데 흑95가 실착으로 하마터면 백이 도리어 유망한 바둑이 될 뻔했다. 그런데 구리의 더 큰 실착이 등장하여 고근태는 위기를 넘겼을 뿐만 아니라 백대마를 잡고 필승의 형세를 구가하게 된 것이었다. 구리의 결정적 실수는 백98이었다. 이 수로는 참고도1의 백1로 들여다보는 것이 얼핏 생각나지 않는 묘착으로서 백이 단번에 형세를 만회할 수 있었다. 만약 흑이 2로 받으면 그때는 백3으로 올라서는 수에 흑의 응수가 막혀 버린다. 이 코스라면 흑이 지리멸렬이다. 으로서는 참고도2의 흑2로 곱게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흑6까지의 절충이 쌍방 최선이 되는데 백이 유망한 바둑이었을 것이다. 실전은 흑99로 웅크린 수가 아래쪽 백대마를 잡는 승착이 되었다. 웅크림으로 상대방의 대마를 확실하게 절명시키다니. 얼마나 교훈적인가. 이제 구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100으로 끊어 중원을 모조리 백의 영토로 만들어야 계가바둑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상에 가까운 목표로 보인다. 고근태의 셔터내리기 솜씨를 감상할 차례인데…. /노승일ㆍ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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