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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던 여름의 강물은 흘러가고 파란 하늘이 청량하기만 하다. 가을은 농경 민족에게 있어 특별한 계절이다. 논과 밭에 흘린 땀방울이 알곡으로 돌아와 넘실거리고, 한 줄기 바람은 ‘그래, 그동안 고생했어.’,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 많았지’라며 사람들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어렸을 때 밥상에서 밥풀을 한 알이라도 흘릴라치면 곡식 소중한 줄 모른다고 어른들께 꾸지람을 듣던 기억이 난다. 이 귀한 곡식으로 밥을 안치고, 떡과 술을 빚어 가장 먼저 조상들께 예를 올리는 일은 인류가 생겨난 이래 가장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시도로 보인다.
한반도에 거주했던 고대인들이 세운 고인돌을 보면 단순히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를 넘어 천문현상을 새겨 넣는 등 그들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대한 실용적인 활동을 했다. 이들은 생존에만 매달렸던 미개인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교감하고 자연에 순응함과 동시에 그것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거대한 자연의 동반자였다. 신농씨 등 삼황오제 전설과 우리나라 고대 유적을 보면 단순히 천지(天地), 일월성신(日月星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제사를 지내고,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와 같은 제천의식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공동체 간 화합과 소통, 생산과 분배, 나눔과 배려의 사회·경제적 요소가 작용한 것이다.
그러니 시절(時節)이 다가오면 제수를 준비하는 일만큼 중한 일이 없었다. 제수품 중에 떡과 과일, 고기보다 중요한 품목이 바로 술이다. 고(古) 조리서(調理書) 중에 1600년대 정부인 안동 장씨에 의해 쓰여진 ‘음식디미방’이 있다. 우리나라 과거 식생활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데 이 책 내용의 3분의 1 가량을 술을 빚는 법에 할애하고 있다. 실생활에서든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올리는 자리에서든 술이 빠지는 일은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그렇다고 법도 없이 흥청망청했던 것은 아니고, 주례에 따라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통로로서, 공동체의 위계질서 확립과 협력의 매개로서 역할을 해왔다.
지금은 생활이 간소해져서 그런지 명절이라고 해서 떡을 찌고 술을 빚는 가정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술을 빚는 일은 알고 보면 김치를 담그는 일보다 쉬운 일이다. 쌀, 누룩, 물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평소 밥을 짓던 솥에 하얀 햅쌀로 고들고들하게 한 단지 가득 밥을 쪄내고, 여기에다 신선한 물과 구수한 누룩 두어 줌을 넣어 버물 거려 안쳐 놓으면 향기로운 술이 된다. 우리가 물질문명에 휩쓸려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많다. 마음 한 번 먹으면 시간이나 돈을 얼마 들이지 않고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번 추석부터는 낯모르는 이가 빚은 송편을 사러가지 말고, 마트 진열대에 있는 첨가물이 잔뜩 들어간 술을 사다 놓지 말고, 쌀가루를 조금 내서 오순도순 예쁜 송편을 빚고, 더불어 술도 함께 빚어보자. /이화선 사단법인 우리술문화원 향음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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