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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설국열차] 굿바이, 봉준호






‘설국열차’에는 봉준호 감독이 만들었다면 있어할 디테일이 빠져있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디테일은 17년 된 옷을 표현하기 위해 겉은 번드르르하지만 실밥이 뜯어진 양복을 표현하는 것도 17년 간 숯검정에 찌들어 멀끔한 얼굴을 가려버리는 분장도 아니다. 봉 감독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디테일은 전복적 가치와 코믹 상황을 포착해내 세밀하게 표현하지만 휙 던져지는 듯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설국열차’에는 전복적 가치만이 탑승했고 이와 부조화 속 조화를 이루는 유머는 빙하 세계 밖으로 사라졌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진지한 메시지가 지루해지고 그것 앞에서 체념이 크게 자리잡는 이유가 된다. 167개 국에서 개봉하기에 애초에 한국 관개보다는 세계의 관객을 대상으로 한 영화이어서 일까? 그래서 보편적 가치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치중한 결과일까?

영화에서 2014년 7월 빙하기가 찾아오고 살아남기 위해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이 있고, 이 사람들로 꼬리 칸부터 머리 칸이 채워지고 이 칸은 계급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열차의 창조자 윌포드는 그들이 속해있는 칸이 그들의 처지이며 주어진 위치이며 질서라고 주입한다. 계급이라는 질서 그리고 누구도 벗어날 수 없게 이것을 매트릭스로 만들어버리는 윌포드는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이데올로기의 은유다. 꼬리 칸의 정신적 지주이자 살아있는 성자 길리엄은 또 어떠한가. 길리엄은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진실’이다. 꼬리 칸에서도 인간성이라는 것을 회복해보려고 노력했던 이이자, 꼬리들의 반란에 힘이 되어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윌포드가 “머리에게 꼬리는 가장 중요한 이들이다”라고 고백했듯 윌포드와 협력자 관계다. 그러나 인간이 이토록 종속적일 수만은 없다. 윌포드와 길리엄이 아무리 매트릭스를 만든다고 해도 ‘자율의지’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자기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미약하나마 작동하는 ‘자율의지’로 꼬리 칸의 반란 리더 커티스는 윌포드에 저항하고 윌포드의 자신의 위치를 승계해달라는 제안을 거절한다.

꼬리들의 처절하고 길고 긴 반란을 지켜보는 관객도 같이 지칠 수 밖에 없다. 과연 반란이 승리로 끝이 날 수 있을지 걱정하는 가운데 봉준호의 특기인 유머라도 있다면 그 웃음의 힘으로 영화를 끝까지 보고 메시지에 공감하겠지만 아쉽게도 그것이 빠져있다.

‘설국열차’는 봉준호 감독에게는 ‘사색의 열차’일 수도 있다. 이미 알려졌듯 ‘설국 열차’는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에서는 열차가 목적이 없이 달려가지만 봉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1년을 순환하는 열차로 바꿨다. 태양이 공전을 하듯 말이다. 영화에서 남궁 민수(송강호)가 열차가 지나면서 1년마다 본 기차 밖 세상의 눈이 아주 조금씩 녹는 것을 감지했다고 말한다. 17년의 공전 끝에 ‘설국열차’는 점점 ‘윌포드’의 세계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17년 간 서서히 이루어진 변화일 것이다. 감독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변화에 대한 속도 말이다.



또 누군가는 한국의 근대화를 일상적인 것으로 표현하면 기차와 시계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시간은 자시 축시 인시 묘시 등 2시간 간격이다. 그러나 기차가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는 자시 축시 인시만으로는 기차의 출발과 도착 시간을 정확하게 할 수 없어서 시계를 빈번하게 사용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빙하기가 찾아온 이유는 도가 넘는 개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이 때문에 파멸하지만 또 다시 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순환을 기차와 이것의 속성으로 표현됐다.

또 산업화와 근대화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산업혁명의 시작은 알다시피 영국이다. 그 원동력은 석탄이었다. 영국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외 여러 작품에서도 묘사되듯 5세 정도의 몸집이 작은 어린이들이 굴뚝청소부나 매우 협소한 광산에 석탄을 캐는 노동을 한다. ‘설국열차’에서도 이와 비슷한 설정이 나온다. 5세 정도의 어린이들이 없어지는 이유가 바로 단종된 열차의 부품을 대신해서 엔진 속에 들어가서 그 역할을 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감독이 ‘설국열차’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던 ‘가난한 자’와 ‘부자’ ‘힘이 없는 자’와 ‘힘 있는 자’의 이야기는 근대화, 개발,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의 결합체다. 이 불편한 이야기를 유머 없이 들을 수 있을까? 고통스러워서 힘들어서 듣기도 보기도 힘들 것이다. 굿바이, 봉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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