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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탄생 100년] '거북선 민족'의 꿈 뒤엔 탁월한 미래 감각·치밀한 준비 있었다

3부. 국민기업의 탄생 <2> 신화보다 더 극적인 조선소 건립 비화

정주영 회장이 1972년 3월23일 현대울산조선소 선박 건조 시업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아산은 허허벌판에 조선소를 세워 대한민국을 조선강국으로 만드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울산에 위치한 현대중공업 조선소 도크에서 배를 건조하고 있다.

건설업 위기 의식·박정희 대통령 강권에 진출했지만

정보수집서 대출·설계까지 철저하게 사전 작업

세계 일류와 겨루며 英 차관·그리스선 수주 성사

선박 인수 거부로 시련 땐 해운사 세워 정면돌파


'미쳤다.' 조선업에 뛰어든 아산 정주영이 받은 최초의 평가다. 대부분 그렇게 여겼다. 조선소 건설 도중 차가 바다에 빠져 죽음과 직면했던 아산이 사력을 다해 빠져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도 "지금 여기서 죽으면 '정주영이 미쳐서 조선소 짓다 결국 죽었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만큼 무모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극복한 힘은 어디에 있을까. 아산은 정말로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와 부지 사진만으로 허허벌판을 세계 최대 조선소로 탈바꿈시켰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무수한 시련과 절벽만큼 넘기 어려운 장애물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공익광고조차 '거북선을 만든 민족'을 내세운 아산의 도전정신과 기지만 강조했기 때문이다. 아산이 당면했던 현실과 그 극복과정은 신화보다 더 극적이고 정교하다. 기업가정신이 다시 피어나기를 바라는 염원이 정주영 신화를 빛나게 만들지만 문제는 부분과 전체의 혼동. 달랑 '지폐와 조선소 부지 사진 한 장'으로 '조선 한국'을 이끌어냈다는 신화는 부분적으로만 사실일 뿐이다. 국제금융계와 선주들이 종이 몇 장에 넘어갈 만큼 만만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신화를 이룬 비결은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가 손꼽힌다. 앞날을 내다보는 동물적 감각과 치밀한 사전준비가 전인미답의 업적을 남긴 원동력이다.

아산이 조선업에 주목한 동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공존한다. 첫째는 중화학공업 육성 의지를 가졌던 박정희 대통령의 강권에 의했다는 것이다. 처음에 주저하던 정주영 회장에게 박 대통령이 1967년께 '앞으로 현대에 대한 정부의 모든 지원을 끊으라'고 압박한 끝에 마지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진출했다는 얘기는 주로 고 박 대통령 주변에서 나온다. 두 번째는 건설업의 위기를 느낀 정 회장 형제들의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오래된 자료일수록 후자에 무게가 실리지만 두 가지 주장이 섞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가 아니었다면 대형 조선소 건설은 불가능했을 터이니까.

확실한 사실도 두 가지다. 박 대통령이 1971년 1월 중화학공업 육성을 처음 강조했으며 이후부터 현대의 조선소 건립도 탄력을 받았다는 점이다. 조선업 진출을 결정한 아산은 치밀하게 준비했다. 국내외 정보수집에서 해외대출, 지급보증에서 설계·감리·시공과 선박 수주까지 처음 진출한 초보자라고는 믿기 어려운 행보를 보였다. 하나같이 세계 최일류로부터 협조를 얻어내거나 겨루면서 아산의 조선업은 싹을 틔우고 힘을 길렀다.



아산은 우선 세계시장부터 살펴 빈틈을 찾았다. 라이베리아의 미국인 선주들과 그리스가 지배하는 해운업에 북구를 중심으로 한 유럽이 도전장을 내밀며 비싼 값으로 선박을 사들이던 마당. 자금력이 상대적으로 달리는 그리스 선주들에게 저가수주가 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시련도 많았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다. 기술제휴선을 꼽은 일본과 독일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거절당하는 과정에서 국제조선업과 금융계의 생리를 파악한 아산이 눈을 돌린 곳은 영국. 먼저 영국 최고 설계회사에 조선소 설계를 맡겼다. 덕분에 영국 은행과 수출보험공사의 서류심사를 통과하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도장을 찍으면서도 꼭 조건을 달았다. 영국 수출보험공사는 보증 조건으로 '선주부터 잡으라'고 요구했다. 초대형 선박을 발주할 수 있는 선주라면 무명의 한국 기업인으로서는 쳐다보지도 못할 대상이었으나 아산은 그리스 선주 라노스를 설득하는 데 끝내 성공했다.

처남이기도 한 선박왕 오나시스와 쌍벽을 이루던 라노스를 만나기 전에도 정보를 쌓았다. '자본력이 탄탄한 북유럽 선주들과 경쟁하려면 저가 유조선이 필요할 것이다.' 라노스가 미쓰비시와의 거래 경험을 통해 신설 조선사에서의 발주를 꺼리지 않는다는 정보도 사전에 입수한 상황. 아산은 알프스 산장에서의 만남에서 영국으로부터 차관 획득의 전제조건이자 신설 조선사의 앞날을 결정한 수주 물량을 따냈다. 고비에 봉착할 때마다 아산의 참모들은 외국 파트너를 서울로 불러들여 삼청동과 종로의 유명 요정에서 접대를 베풀었고 이 덕분인지 목표가 다 이뤄졌다.

유례를 찾을 수 없이 조선소 건립과 동시에 초대형 선박을 건조하는 과정은 순탄하게 끝나고 진수식도 국가적 축제 분위기 속에서 성대하게 마쳤지만 아산에게는 또다시 위기가 찾아들었다. 26만톤급 쌍둥이 유조선을 발주한 그리스 선주 라노스가 한 척의 인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인수단가를 후려치려는 계략에 말려 고통받을 즈음 26만톤급 초대형 유조선 2척을 발주한 홍콩의 선주가 부도를 맞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산은 졸지에 완성된 초대형 유조선 3척을 떠안았다.

호사가들은 "동해를 떠도는 유령선 3척 때문에 현대가 몰락할 것"이라고 떠들고 "정주영이 미쳤다"는 말이 다시 나돌 때 아산은 다시 단안을 내렸다. '직접 떠안는다. 해운회사를 차리자.' 이렇게 해서 생긴 회사가 아세아해운. 오늘날 현대상선의 전신인 아세아해운은 최신식 26만톤급 유조선을 3척이나 보유했지만 영업에 나설 수 없었다. 한국 원유 수송을 독점하던 미국 걸프사와의 수십 차례 협상으로 수송권을 따냈지만 이번에는 경험이 없었다. 선장도 선원도 없는 상태에서 전 세계를 수소문해 한국인 선장을 찾아낸 뒤 결국 첫 유조선을 띄울 수 있었다. 한국인이 만들어 한국인 선장과 선원이 타고 한국인들이 쓸 원유를 실은 국적 유조선 시대가 이렇게 열렸다.

해운회사를 세운 뒤 세계적으로 신규 조선 수요가 일고 해운업이 번창하면서 현대에는 오일달러가 쌓였다. 그로부터 10년 만에 현대는 세계 1위 조선사로 떠올랐다. 치밀한 준비가 있었지만 '미친 정주영'이 없었어도 가능했을까. 세계 초일류와 맞서 결국 그들을 능가한 아산의 비결은 순간의 기지뿐 아니라 시련에서 축적된 경험과 불굴의 도전정신이다. /권홍우 선임기자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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