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자녀를 둔 A씨는 2년째 아이와 함께 사실상 ‘은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중학교 시절부터 급격히 체중이 늘어 고등학교 입학 후 자퇴를 결정했고, 외부 활동도 전면 중단한 상태다. A씨는 “더 이상 손 놓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비만 치료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고 토로했다.
비만은 지방세포 수가 증가하거나 크기가 커져 신체 조직에 지방이 과도하게 축적된 상태다. 단순한 체형 문제가 아니라 당뇨병·고혈압·지방간·이상지질혈증 등 다양한 만성 질환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질환이다. 세계적으로 비만 유병률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이런 추세는 소아청소년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산하 건강보험연구원의 ‘아동·청소년 비만 예방 의료서비스 강화 방안 연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소아청소년의 비만 유병률은 영유아 8.3%, 초·중·고 학생 16.7%로 집계됐다. 영유아는 12명 중 1명, 학생은 6명 중 1명꼴로 비만인 셈이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 분석에서도 2022년 기준 한국 5~19세 아동·청소년의 과체중 및 비만 유병률은 남학생 43.0%, 여학생 24.6%로 한·중·일 3국 중 가장 높았다.
소아비만은 단지 성장기 때만의 문제가 아니다. 비만인 아이는 정상 체중 아이보다 성인 비만으로 이어질 위험이 5배 이상 높다. 성인의 경우 지방세포의 크기 증가가 비만의 주된 특징인 반면 소아비만은 지방세포의 수 자체가 늘어난다. 한 번 증가한 지방세포는 성인이 되어서도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어릴 때 비만이 심할수록 성인이 된 후에도 체중 조절이 더욱 어렵다.
비만이 소아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도 뚜렷하다. 차의과학대학교 분당차병원 김성혜 교수 연구팀이 10~18세 소아청소년 1만 1554명을 분석한 결과 전체 집단에서 과체중·비만 비율은 25.1%, 고혈압 유병률은 10.4%로 나타났다. 하지만 과체중·비만에 해당하는 집단만 따로 보면 고혈압 유병률은 17.6%로 전체 평균보다 1.5~2배가량 높은 수치였다.
김민선 대한비만학회 이사장(서울아산병원 내분비내과 교수)은 “청소년은 자제력이 약하고 유혹도 많기 때문에 약물 치료나 수술 등 보다 적극적인 치료 개입이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심한 비만은 사춘기 때는 물론 향후 성기능이나 사회적 관계 형성에도 영향을 줄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취업이나 결혼 등 사회생활 전반에서 불이익을 초래할 수도 있다”며 “조기 교육과 개입을 통해 악화르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치료의 시작을 유치원 시기까지도 앞당겨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글로벌 제약사들도 소아청소년 비만 치료의 필요성에 주목하며 관련 시장 확대에 나서고 있다. 노보 노디스크는 GLP-1 계열 비만치료제 ‘위고비’에 대해 12세 이상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사용 허가를 각국에 신청했으며, 미국에서는 이미 승인을 받았다. 국내 식품의약품안전처에도 최근 12세 이상 사용 허가를 신청해 조만간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일라이 릴리 또한 경구용 비만치료제 ‘오르포글리프론’을 당뇨병·뇌졸중 등 위험 요인이 있는 BMI 25 미만의 환자까지 확대해 투여할 수 있도록 개발 중이다. 데이브 릭스 릴리 최고경영자(CEO)는 “과체중으로 분류되지 않는 체질량 지수(BMI·체중을 키의 제곱으로 나눈 수치)를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항비만 약물을 연구할 계획”이라며 “체중 감량보다 환자들의 장기적인 건강 유지를 위해 BMI 기준을 낮출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비만 치료 신약에 대한 부작용과 요요현상에 대해 “약의 문제 보다 관리의 연속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개발된 비만치료제는 과거와 달리 중추신경계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위장계 불편감 정도”라며 “약물 중단 시 체중이 다시 증가할 수 있다는 점은 당뇨병이나 고혈압 등 만성질환 치료제와 동일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비만치료제는 식욕을 조절해 환자가 식단과 운동을 병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도구로 봐야 한다”며 “약물 복용과 생활습관 개선을 병행한 뒤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약을 줄이거나 중단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비만을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게 김 이사장의 판단이다. 그는 “비만은 중독처럼 사회적으로 낙인찍히는 경향이 있지만, 이 문제를 개인 탓으로만 돌려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며 “미국 하버드대의 비만센터 연구에 따르면 고도비만 환자가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감량에 성공할 확률은 5% 미만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개인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고칠 수 있는 질환이 아니고, 사회적 비용 절감을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 이사장은 “현대 사회는 배달 음식, 고열량 식품, 좌식 생활 등 비만을 유발하는 환경이 일상화되고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함께 대응해야 한다”며 “비만은 초기 단계에서 개입할수록 효과가 크지만 중증 비만과 합병증으로 진행되면 치료가 어려워지고, 고령화와 맞물릴 경우 의료·복지 비용 부담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의료 현장에서는 비만치료제에 건강보험을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비만을 질병으로 보고 있고 미국에서는 공공 의료보험시스템 메디케어를 통해 비만치료제를 처방받을 수 있다. 김 이사장은 “현장에서 비만치료를 시작해도 치료제가 비싸다보니 경제적 부담 때문에 치료 기간이 6개월을 넘기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중증 비만 환자부터라도 건강보험 적용을 통해 조기에 적극적인 치료 개입이 이뤄져야 향후 더 큰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만 보험 재정이 한정돼 있는 만큼 우선순위를 설정해 비만도가 높거나 당뇨 등 합병증이 있는 고위험군부터 단계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며 “향후 약값 인하와 데이터 축적이 병행된다면 적용 범위도 점차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