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의 백16은 발이 좀 느려 보이지만 매우 실전적인 굳힘이다. 예전에는 가에 두는 일이 많았지만 근래에는 몇몇 기사, 예를 들면 유창혁9단 같은 기사 이외에는 그렇게 두지 않는 경향이다. 삼삼을 파먹히지 않겠다는 뜻이다. 원성진도 똑같은 취지에서 17로 타이트하게 지켰다. 19로 벌린 것은 철저하게 집으로 리드하겠다는 태세. 여기서 5분쯤 뜸을 들인 구리는 매우 도발적인 수를 들고나왔다. 백20이 그것이었다. 집짓기로 가자면 이 수로는 참고도1의 백1이 정착일 것이다. 흑은 2에서 6으로 모양을 키울 것이 뻔하고 백은 7로 쳐들어가는 바둑이 될 것이다. 구리는 이 코스가 ‘어쩐지 흑에게 주도권을 주는 길’ 같아서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흑21의 역습은 지극히 당연하다. 계속해서 흑25까지는 필연. 여기서 구리는 다시 5분쯤 생각에 잠겼다. “그냥 뛰자니(나에) 좀 밋밋한 것 같아서 궁리를 하는 거예요.” 사이버오로 검토실의 안조영이 하는 말. 참고도2의 백1로 붙여서 11까지를 선수로 활용하고 13으로 벌리는 연구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안조영이 말하자 서봉수9단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는 두지 않을걸. 우상귀를 그런 식으로 굳혀주지는 않을 거야. 구리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지 않은 한 상대방의 집을 굳혀주지를 않아.”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백26이 화면에 떴다. 흑더러 다에 받아 달라는 주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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