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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 Life] 오태석 창단 30돌 극단 '목화' 대표

삶 되돌아보게 하는 연극의 매력에 빠져 오늘도 무대 지키죠



제자들과 동인제 극단 창단 현대사회 갈등 작품에 녹여

연극의 비약·생략·압축이 극적 재미 주는 필수 요소 나머지는 관객이 채우게 해야

내가 살려면 상대방 인정 필요 새 작품서 다양성 이야기할 것

"요즘 젊은 친구들이 진지한 연극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오히려 그런 공연을 만날 수 없는 '결핍의 시대'가 젊은이로 하여금 감각적인 볼거리를 찾게 만드는 겁니다. 사실 요즘 사람들은 역사의 진실에 굶주려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그 무언가를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그런 배고픔이 일흔이 넘은 내가 지금까지 무대를 지킨 이유이자 원동력이지요." 칠순을 훌쩍 넘긴 연극계의 거장 오태석(74·사진) 목화 대표 겸 연출가는 공연이 있는 날이면 하루종일 무대 앞 객석에서 배우들의 몸놀림·발성·무대조명 등 모든 것을 꼼꼼히 점검한다. 그래서 극단 목화의 공연은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이 다르다고 한다. 1984년에 문을 연 목화를 통해 지난 30년 동안 우리 소리, 우리 몸짓을 연극 언어로 발산시켜온 오 연출가는 한국 연극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대학 졸업 후 반세기 동안 60여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영어·일어·중국어 등으로 번역된 20여권의 희곡집을 내는 등 한국 연극의 어제와 오늘을 지켜왔던 것이다.

◇열 살 소년,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다=일본 와세다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부친은 경무대(청와대의 옛 명칭) 법무관이었다. 6·25전쟁이 터졌지만 어머니가 해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가족이 피란 가지 못했다. 7월 중순 남대문 인근에 있던 집으로 인민군이 들이닥쳐 총을 들이대고 아버지를 끌고 갔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하루아침에 세상의 모든 질서와 평범한 일상이 뒤집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열 살 나이에 목격했던 것이지요. '아! 이건 가짜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때 연극을 처음 본 겁니다. (그는 자신이 겪은 비극을 연극에 비유했다.)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니까 완전히 딴 세계가 펼쳐진 셈이지요."

종손이었던 그는 할머니를 따라 고향인 아룽구지(충남 서천의 한산면)로 피란을 떠났다. 한 달 넘게 걷고 걸어서 도착한 집성촌에서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3년을 보냈다. 그는 시골에서 보낸 3년이 자신에게 치유의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전쟁이 세상을 뒤집어버리는 것을 봤지만 자연 속에서 숨 쉬면서 일상을 꾸려가면서 내 자신이 치유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하지만 전쟁이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갔던 그 시절 아룽구지라고 해서 평화로울 수는 없었다.

당시 읍내 등기소에서 유지 120여명을 한꺼번에 불태워 죽인 사건, 읍내 저잣거리에서 장정들이 죽창을 들고 돌아다니던 장면 등 10대 소년이 목격한 전쟁의 잔인한 흔적은 훗날 수많은 작품에서 모티브로 등장한다.

◇연극을 만나고 인생이 바뀌다=전쟁이 끝난 후 중학교 때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으나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불행한 시절로 규정한다. 부친의 납북 사실과 전쟁 당시 목격한 참상으로 인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감춰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신을 본모습과 겉모습으로 철저하게 가렸다. "일종의 위장, 마스크를 써버린 셈이지요. 내가 사실 체구도 작고 주먹 힘도 내세울 것 없는데 깡패인 척(마스크를 쓰고)하며 학교를 다녔어요. 배제고등학교 1학년 때는 아이스하키부를 만들면서 주도권을 잡으려고도 했지요."

그런 와중에 공부는 곧잘 해서 서울대 사회학과를 지망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외로 낙방이었다. 인생에서 처음 맛본 실패에 충격받은 그는 수덕사 암자에 들어갔다. 아들이 혹여 스님이 될까 걱정이 태산 같았던 어머니가 오 연출 몰래 연세대 철학과에 원서를 넣었고 이듬해 그는 수석 합격했다. "당시 연세대 시험 제도가 시험 반, 고등학교 성적 반이라 제 성적 정도면 무난히 합격했던 거죠. 나중에 어머니한테 왜 철학과에 원서를 넣었는지 물어보니까 제가 절에 들어가서 공부한다고 했으니 철학과 정도면 별 탈 없이 적응할 것이라 생각해서 원서를 넣었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공부에는 전혀 뜻이 없었던 그는 우연히 공연을 준비하던 연희극예술연구회 회원을 만나면서 연극과 길고 긴 인연을 맺는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연희극에서 친구들과 연극 만들고 다른 극단의 연극을 보면서 새롭게 눈을 떴지요. 게다가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문화를 키운다면서 국립극장이 장막극을 모집했던 겁니다. 상금이 탐이 나 지원했는데 덜컥 당선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됐지요."

1962년 국립극장 장막극 당선작이자 그의 데뷔작인 '영광'은 공모 마감 하루 전에 공모 사실을 알고 상금 욕심에 하룻밤에 쓴 희곡이라고 한다.

"명동 찻집에서 고등학교 동문들과 얘기하는데 박정희 정권이 엄청난 상금을 걸고 시민예술제를 연다는 거예요. 예술제에서 9개 단체를 뽑는다는데 작품만 갖고 선정한다고 하더군요. 상금이 엄청나다는 말에 혹해서 연세춘추 다니는 친구한테 원고지를 구해 하룻밤에 쓴 게 바로 '영광'이었어요. 솔직히 당선될 줄은 몰랐지만 막상 되니까 극단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회로무대'라는 동인제 극단(단원들이 극단에 동등한 권리와 의미를 지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극단)을 만들고 시작했지요. 어쨌든 무대에 올린 공연도 좋은 점수를 받아서 2등을 했고 주인공을 맡았던 철학과 동기는 연기상도 받았으니 잘 된 거지…."

상금을 타기 위해 창작열을 불태웠던 일화는 또 있다. 연세대에서 입학·졸업식 등 주요 행사에서 자주 불리는 '연세찬가'는 그가 교내 가사 공모에서 상금이 탐이 나 급하게 쓴 노랫말이라고 한다. "당시에 공연을 무대에 올려야 했는데 제작비가 부족하더라고. 그런데 학교에서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학교 찬가 공모를 한 거예요. 상금이 한 학기 등록금보다 많아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도 돈이 남았을 정도였지요."

그 이후 1967년 희곡 '웨딩드레스' '화장한 남자들', 1968년 '환절기'가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연출가이자 극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극단 목화와의 30년 인연, 지금도 현재진행형=오 연출과 그의 제자들이 주축이 돼 1984년 창단한 극단 목화는 아시아에서도 몇 안 되는 동인제 극단이다.

1984년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초분' '태' '춘풍의 처' '부자유친' '천년의 수인' '백마강 달밤에' 등 숱한 화제작을 발표해온 목화는 박영규·김병옥·김응수·손병호·장영남·황정민·유해진·성지루·박희순·정은표 등 영화와 드라마에서 개성 넘치는 연기로 잘 알려진 걸출한 배우들을 배출하며 '배우 사관학교'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왜 목화라는 이름을 선택했을까. 그는 "껍데기는 딱딱하지만 속은 무엇보다 부드러운 목화, 겉과 속이 끊임없이 갈등하는 목화의 성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그래서 '목화'의 작품은 우리 전통극의 형식을 활용하면서도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과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지요."

오 연출의 작품 세계를 설명할 땐 비약·생략·압축이라는 단어가 항상 등장한다.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서양극 혹은 요즘 무대에 오르는 작품들과는 달리 '오태석표 연극'은 비논리적·비약적으로 극이 펼쳐지기 때문. 이에 대해 오 연출은 '비약'과 '생략'이야말로 연극적 재미를 주는 핵심적 요소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생활하면서 자신이 매일 해오던 익숙한 일만 합니다. 자주 쓰는 머리가 있는 반면 평상시 쓰지 않는 머리가 있다는 말이지요. 이 쓰지 않는 머리를 쓰도록 하는 게 연극이에요. 폐쇄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의 얘기에 집중하고 삶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연극이 적당히 비워져 있고 충분히 생략돼야 합니다. 그러면 관객이 그 머리를 써서 자기만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생략된 부분은 관객이 채울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무대를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는 요즘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제목이나 구체적인 줄거리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는 새 작품을 통해 다양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요즘 역사 교과서 논란 등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들여다보면 상대방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아 결국 상대방이 망할 때까지 싸움질을 합니다. 상대방 망하라고 지독하게 싸우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아요.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평범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생각날 때마다 이면지에 직접 글을 쓴다는 우리 연극의 거장은 오늘도 배우들의 연기를 일일이 고쳐 잡고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호통을 치면서 작은 무대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He is …

△1940년 충남 서천

△1963년 연세대 철학과

△1963~1965년 극단 회로무대 창단

△1984년 극단 목화 창단

△1997년, 2006년, 2011년 동아연극상

△1995년~ 서울예술대학 석좌교수

△2004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2006~2008년 국립극단 예술감독

△2011년 영국 에든버러 인터내셔널페

스티벌 헤럴드엔젤스상

△2012년 셰익스피어어워즈 연출상

30돌 기념작 '자전거'

6·25때 마을주민 집단 학살… 치유 안된 전쟁의 상흔 그려

극단 목화가 창단 30주년을 맞아 선보이는 기념 연극 '자전거'가 2월 2일까지 대학로 스타시티 예술공간 SM 무대에 오른다. 오태석 대표가 극본을 쓰고 김우옥 연출로 1983년 초연했던 작품이다. 1984년 극단 목화 창단 이후 1987년 다시 선보였으며 이번 공연은 2004년 이후 10년 만이다.

배경은 1983년 10월 경남 거창의 면사무소. 한동안 결근했던 윤 서기가 사무실에 나와 결근계를 쓰고 있다. 그가 '길가에 암매장된 처녀가 야밤에 길가는 사람 불러 잡는 바람에 졸도, 이후 경기로 눕게 되어 42일간 출근이 불가했다'는 황당한 사유서 초안을 동료인 구 서기에게 보여준다. 구 서기는 40여일 전 그날 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윤 서기를 채근한다. 그런데 당시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근계를 작성하기 위해 42일 전 밤길을 되짚어본다. 이 작품은 윤 서기의 이러한 기억의 여정으로 진행된다.

윤 서기가 기절했던 날은 마을 전체의 제삿날이다. 6·25 당시 윤 서기의 당숙이 인민군의 강요로 등기소에 불을 질러 윤 서기의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을 죽인 날이다. 그런데 윤 서기는 당숙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42일 전 밤에 알게 됐다. 그는 그날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등기소를 불태우며 죽은 사람들을 호명하는 제의적인 광경, 그 옆에서 당숙이 "내가 죽였다"면서 자해하는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리고 충격에 휩싸여 42일 전의 일을 일시적으로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방황 끝에 윤 서기가 기억은 되찾았으나 결근계는 사실대로 쓰지 않는다. 완전한 치유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목화의 '자전거'는 오늘과 42일 전, 6·25전쟁까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현실과 기억, 그리고 환영이 엇갈리는 독특한 형식으로 집단과 개인의 비극을 다룬다.

한편 극단 목화는 '자전거'에 이어 연극 '봄봄'을 올리고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을 맞아 영국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에서 호평을 받았던 '템페스트'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어서 10월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에 맞춰 '아리랑'을 공연하고 연말에는 뉴욕에서 공연을 벌일 예정이다.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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