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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 흑진을 유린한 것 같지만 기묘하게도 흑은 상처를 입지 않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백대마가 아직 온전한 안형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서봉수는 이리저리 활로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대마의 앞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좌변에 조성된 흑의 철벽이다. 서봉수는 흑61을 보자 돌을 던졌다. 7판 가운데서 가장 먼저 끝난 바둑이었다. 기자들이 창하오를 에워싸고 질문 공세를 폈다. “이긴 소감은?” “감격스럽습니다. 세계적인 강자를 꺾게 되다니.” “콧수염은 언제나 기르고 다니는가?” “아녜요. 처음으로 한번 길러 봤어요. 길렀다기보다 며칠을 안 깎은 것이지요.” “한국 바둑에 대한 생각은?” “일본을 능가한다고 생각합니다. 장래에 저의 진정한 상대는 일본 기사가 아니고 한국의 기사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이창호에 대한 느낌은?” “세계 최강이라고 봅니다. 저희 나라에서는 제 이름이 이창호와 똑같아서 늘 화제가 됩니다.” 한편 서봉수는 대국실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검토실에 나와 보았자 기자들의 등쌀에 심히 곤혹스럽기만 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관전기 담당인 필자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애써 피하고 있었다. 지금은 30년 연하의 베트남 여자와 재혼하여 새살림을 차린 서봉수. 그가 전처와 헤어진 원인은 딱 한가지. 그의 바람기였다. 이 바둑을 둔 1994년 여름은 그의 바람기가 유난히 나부끼던 무렵이었고 그 소상한 내용을 필자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눈 마주치기를 피했던 것이다. 161수끝 흑불계승. /노승일ㆍ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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