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은행의 해외 진출 바람이 거세다. 내수 시장에서 수익이 갈수록 악화되다 보니 해외 시장 개척은 미래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처럼 간주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은행의 해외 진출 양상도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가 연상될 만큼 경쟁적 분위기가 감돈다.
하지만 지난 8일 서울 을지로 본점 집무실에서 만난 윤용로 외환은행장은 "각개약진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은행의 해외 진출이 자충수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해외 영업 현실이 제한적임을 감안하면 밖에서도 제살 깎아먹기 경쟁이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 은행이 인도네시아ㆍ브라질 등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그런데 해외에서 할 수 있는 영업이라고 해봐야 현지에 나간 국내 대기업과 협력업체 등을 상대하는 기업금융에 국한돼 있습니다. 리테일(소매금융)을 할 여건이 안 돼요. 단기 업적주의가 팽배한 기업 현실을 떠올리면 한정된 파이를 놓고 금리 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는 그러면서 "해외로 따로따로 나가기보다는 은행이 공동 출자해 지분만큼 수익을 가져가고 글로벌 인재도 함께 양성하는 모델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며 ING그룹을 예로 들었다. 윤 행장은 "ING그룹의 경우 1980년대 은행간 파트너십 형태인 '인터내셔널 네덜란드 그룹'을 꾸려 해외로 나가 글로벌 금융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며 "단독으로 나갔다면 현재의 글로벌 역량을 갖춘 금융그룹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글로벌 은행인 씨티ㆍSC은행도 국내에서 고전하고 있지 않나. 현재 방식으로는 10년 뒤에도 (한국 금융의 글로벌화는) 별 진전이 없을 것"이라고 냉정히 평가했다.
특히 관료 출신 은행가답게 "(라이벌 의식 때문에) 시중은행 간에는 이런 논의가 힘든 만큼 정부가 나서서 모종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윤 행장이 새로운 해외 진출 모델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외환은행의 23개국 54개 영업망을 둘러보며 국내 은행의 사정을 절감한 덕분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120개 은행이 영업을 하고 있는데 외환은행과 하나은행의 자산규모를 합해도 40위권에 불과해요. 1990년에 현지법인을 설립한 외환은행은 현지에 진출한 기업과 협력업체 등을 대상으로 기업금융을 해왔고 하나은행은 현지은행을 인수해 리테일 영업을 해왔음에도 많이 부족합니다. 브라질에도 국내 기업은 현대차 정도밖에 없는데 그런 곳에 와서 적자를 내게 되면 국내에서 문책을 피하기 어려워요. 금리를 후려쳐서라도 현지 진출 기업을 뺐기 위한 경쟁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는 10월 현지 시장 점검차 들른 미국 워싱턴에서의 경험도 들려줬다.
"현재 10조원의 자금을 운용하는 성공한 미국인 펀드매니저를 만났는데 '한국에 투자하라'고 했더니 '모르는 시장에는 안 한다'는 답이 돌아오더군요. 우리는 남들이 좋다고 하면 무조건 나가고 보는데 일류는 그렇지 않아요."
윤 행장은 "국내 건설업체도 법도 규제도 잘 모르는 채 해외로 나가 저가 수주 경쟁에 몰두한 끝에 망했다"며 "중장기적인 플랜을 만들어 금융산업 전체가 기회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해외 진출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