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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다이먼(52) JP모건 회장겸 최고경영자(CEO)가 미국 5위 투자은행 베어스턴스를 인수한후 미국 언론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금융제국 씨티그룹을 물려받을 황태자에서 일순간 추락하고 시카고에서의 절치부심한 뒤 JP모건 CEO로 월가에 복귀하기까지 그의 인생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1982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아버지의 상사였던 샌포드 웨일 아메리칸익스프레스 CEO를 찾아가면서 월가와 인연을 맺는다. 졸업 후 진로문제를 협의하러 그를 찾아간 다이먼은 웨일 CEO의 개인비서로 채용됐다. 다이먼은 월가의 M&A귀재였던 웨일로 부터 어깨너머로 경영수완을 배웠다. 웨일이 아멕스에서 쫓겨 날 때 다이먼은 그를 따랐다. 이 때 다이먼은 웨일의 양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웨일은 트레블러스를 인수하면서 화려하게 월가에 복귀한 뒤 1998년 씨티코프와 합병, 세계 최대 종합금융회사인 씨티그룹을 탄생시켰다. 웨일을 보좌했던 다이먼은 씨티그룹 출범 후 계열 증권회사인 살로먼스미스바니 CEO를 맡았다. 월가에서는 42세의 다이먼이 CEO로 발탁되자 웨일이 그를 씨티그룹 후계자로 낙점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자산 1조2,000억 달러 규모의 씨티그룹이 출범한 이후 다이먼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특히 다이먼이 샌포드 회장의 딸 제시카 비블로위츠의 임원 승진을 반대하면서 두 사람 사이는 결정적으로 갈라졌다. 차기 승계를 둘러싼 씨티코프와 트레블러스간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다이먼은 결국 1998년 11월 씨티그룹에서 축출당했다. 다이먼의 낙마에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웨일 회장의 두려움도 작용했다. 1년 4개월의 방랑 생활을 거쳐 다이먼은 2000년 3월 당시 5위 은행이던 시카고 소재 뱅크원 CEO를 맡아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당시 그는 즐기던 골프를 끊고 복싱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신용카드 부실로 경영난에 시달리던 뱅크원을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탄탄한 은행으로 탈바꿈시켰다. 월가의 주목을 다시 받자 당시 2위 은행이던 JP모건의 윌리엄 해리슨 회장에게 M&A를 제의, 이를 성사시키면서 월가에 복귀했다. 당시 JP모건이 뱅크원을 인수한 것은 은행의 덩치를 부풀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고령의 윌리엄 해리슨회장이 유능한 경영자인 제임스 다이먼을 영입해 후계자로 삼기 위해 이뤄졌다는 평이 유력하다. 그만큼 그의 능력은 탁월했다. 그는 재무적 안정성을 중시하는 경영자로 통한다. JP모건이 서브프라임 태풍에 비교적 손실(상각처리액 32억달러)규모가 적은 이유다. 이후 JP모건이 체이스맨해튼은행에 인수됐음에도 불구하고, 다이먼은 합병회사의 최고경영자가 됐다. 다이먼은 비록 씨티그룹의 황제에 오르지 못했지만, 씨티의 경쟁업체에서 최고경영자로 일하며 미국 금융가를 군림하고 있다. 다이먼이 씨티그룹을 떠난 지 10년 가량 흐른 지금 씨티그룹과 JP모건의 위상은 극단을 달리고 있다. 씨티그룹은 221억달러의 상각처리로 신용위기에 하루 하루 살얼음판을 걷지만, JP모건은 베어스턴스 인수로 옛날의 화려한 명성을 회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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