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영화거나 휴먼드라마, 혹은 최루 영화…. 영화 ‘화려한 휴가’(감독 김지훈ㆍ제작 기획시대)에 투자를 망설이던 CJ엔터테인먼트의 김주성 대표에게 김지훈 감독은 “5ㆍ18을 주제로 ‘볼케이노’나 ‘딥임팩트’ 같은 재난 영화를 만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1980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이란 소재를 재난 영화라는 주제와 연결시킨 이 독특한 제안에 김 대표는 가슴이 울렁거렸고 “이번엔 뭔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에 선뜻 투자를 약속했다. 지난 5일 열린 언론시사회를 일주일여 앞두고 기자들에게 털어 놓았던 김 대표의 투자 배경을 곧이 곧대로 듣는다면 화려한 휴가는 애초에 할리우드가 좋아하는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로 출발한 셈이다. 영화 개봉에 앞서 시나리오를 미리 본 몇몇 영화 관계자들은 오히려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우리 비극적 현대사를 바탕으로 한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고 평했다.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했을 뿐 영화의 흐름은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형제애란 보편적인 인간 정서를 부각시킨 뻔한 범작이란 우려도 섞였다. 위기에 빠진 한국 영화를 구해줄 우리 영화계 올해 최대 화제작이란 점에서 화려한 휴가는 시사회 전부터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최근 자금난에 시달리는 영화계에서 100억원이란 거금이 투자됐다는 점도 기대를 갖게 한 이유다. 처음 제작 의도와 시나리오의 흐름이야 어떠했든 화려한 휴가는 그저 재난 영화, 휴먼 드라마라는 단 한마디 말로는 단정 지을 수 없다. 항쟁에 참가한 하나 뿐인 동생 강진우(이준기)를 구하기 위해 총탄 사이를 오가는 택시 운전사 강민우(김상경)의 모습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고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택시 운전사 인봉(박철민)이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진 무고한 시민들의 모습을 보고 아내의 손길을 뿌리치고 시민군에 합류하는 대목에선 휴먼 드라마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주인공 강민우가 사랑하는 간호사 박신애(이요원)를 뒤로 하고 계엄군과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는 광주 도청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장면은 고전 최루성 멜로 영화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돌아 올 수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신애가 민우에게 “내일 저 데리러 오실 거죠”라고 울먹이는 대목에선 도무지 눈물을 참아낼 재간이 없다. 이 영화의 묘미는 바로 이런데 있다.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란 거대한 역사 소용돌이에 휘말린 인간 군상들의 아픔과 연민을 다양한 시각으로 관객들에게 전해 준다. 화려한 휴가는 기억 속에 가물가물 잊혀져 가는 27년 전 우리 역사의 비극을 영화라는 대중 예술 매체가 가진 온갖 종류의 매력을 동원하며 감동을 일궈 낸다. 택시 운전수 강민우는 서울대 법대를 꿈꾸는 고등학생 동생 강진우가 다니는 성당의 신자 박신애를 좋아한다. 신애는 다름 아닌 강민우의 택시 회사 사장 박흥수(안성기)의 딸. 예비역 대령 출신인 박흥수는 광주 시민을 진압하기 위해 찾아온 옛 부하의 얘기를 듣고 불안해 한다. 그의 불길한 예상대로 5월 18일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을 단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되고 계엄군은 5월 21일 도청 앞에서 대규모 발포를 시작한다. 항쟁 대열에서 동생을 잃은 강민우는 시민군에 가담한다. 시민군이 사수하는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최후 진압작전을 앞두고 시민군 대장이 된 택시 회사 사장 흥수는 자신의 딸 “신애를 부탁한다”며 민우를 내보낸다. 하지만 민우는 신애와의 가슴 시린 이별의 장면을 뒤로 하고 도청으로 돌아가 최후를 맞는다. 굳이 따지자면 독립 영화 ‘오! 꿈의 나라’를 비롯해 ‘꽃잎’‘박하사탕’ 등과 함께 광주 민주 항쟁 관련 영화로 단순하게 분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 영화에서나 다룰 법한 묵직한 역사적 소재를 상업 영화의 미덕인 대중적인 재미 속에서 깔끔하게 풀어 냈다는 점에서 분명 이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26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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