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A사장은 동남아 지역에 진출한 국내 대형 건설사 현장 관계자 B씨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았다. B씨는 현지 업체의 물건을 검토해보니 현장에서 도저히 사용하기 힘든 불량품으로 판명이 났다며 도움을 청했다.
사실 이 계약은 원래 A사장이 거의 하기로 돼 있었지만 계약성사 직전 현지 업체의 로비로 무산된 건이었다. A사장은 괘씸한 마음도 들었지만 공기연장만큼 건설업체에 심각한 일도 드물고 현지 상황도 뻔히 알기에 납품대금을 한 달 후에 현금으로 받기로 구두로 약속한 뒤 서둘러 수억원어치에 달하는 제품을 보내줬다.
문제는 그 후였다. 본사 구매팀에서는 공식적으로 거래를 승인한 적이 없으니 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A사장은 본래 해외 현장에서 급하게 SOS를 요청하면 구두로 계약하고 나중에 신청하는 게 관행이라고 하소연했지만 오히려 '절차를 지키지 않은 당신 책임이 더 크다'는 질책만 받아야 했다.
수억원이 공중에 사라지자 A사장은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결국 넉 달 만에 계약대금을 받았지만 돌아온 것은 이자도 지급하지 않는 어음이었다. 또 한번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본사에 항의하고 언론과 검찰 등에 알리겠다고 반발한 끝에 겨우 현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
지난해 대·중소기업 관계 정상화를 위한 입법 조치들이 있었다. 또 대기업 총수들의 동반성장 의지 역시 확고해 보인다. 하지만 산업 현장에서는 아직도 '갑의 횡포'가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A사장의 호소를 들으면서 대기업 총수 인식이나 제도개선보다 중요한 것은 중소기업인들이 현장에서 만나는 대기업 직원들의 마인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업 직원들이 아무 생각 없이 절차를 운운하는 사이 건실한 수출 중소기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다.
우월의식에 젖어 있는 일부 대기업 직원들은 자신은 동반성장과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중소기업인들이 대면하는 사람들은 대기업 총수나 사장이 아니라 부장·과장·대리들이다.
실제로 기자가 만나본 중소기업인들은 대기업 경영진의 확고한 동반성장 방침에도 불구하고 실무선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을 경험한다고들 한다. 중소기업과 직접 만나는 대기업 직원들은 스스로 자신이 비정상의 예외로 남아 있으려 하는 건 아닌지 차분히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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