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 스웨덴판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이다. 나치의 학살에서 그가 직간접적으로 구해낸 유대인은 약 10만여명. 오스카 쉰들러의 구출명단에 오른 1,200여명보다 훨씬 많다. 그는 스웨덴 최대 재벌인 발레베리가의 일원. 1912년 태어나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뒤 은행업에 종사하던 중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감시할 중립국 외교관이 필요하다는 소식에 주저 없이 직업을 바꾸고 부다페스트를 찾았다. 스웨덴 정부 명의의 건물 23개동 매입, 여권발행 등으로 직접 구출한 유대인이 3만3,000여명. 독일군 사령관에게 ‘전범으로 고발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아 7만여명의 가스실행도 막았다. 독일은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으나 스웨덴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해 대놓고 막을 방법이 없었다. 위기는 소련군 진주 뒤 일어났다. 1945년 1월17일 행방불명. 납치 의혹을 받던 소련은 침묵으로 일관하다 1957년에야 ‘라울은 독일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조사를 받던 중 1947년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발표했으나 진상은 확실치 않다. 1980년대에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라울을 봤다는 사람부터 처형설까지 여전히 분분하다. 라울의 죽음은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그 고귀한 삶은 ‘발렌베리 그룹’의 명성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 발레베리 가문은 세금회피를 위해 본사를 외국으로 옮기는 다른 재벌과 달리 끝까지 스웨덴에 남아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국민기업. 해군장교 복무와 자력에 의한 해외유학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경영 승계권을 인정 받지 못하는 가풍도 유명하다. 핏줄로 이어지는 경영권이 국민의 존경과 사랑 속에 6대째 승계되는 비결에는 희생과 솔선수범, 라울로 대표되는 숭고한 인간애가 깔려 있다. 부럽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