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쑥날쑥한 경영자 심기 배려
긍정적 얘기로 긴장 풀어주고 "기운 내세요" 한약 지어주기도
인사동향 묻는 동료엔 '모르쇠'… 가장 큰 업무 고충은 '상시대기'
CEO 모시며 결단력 등 배워 한편으로 최고의 멘토링 기회
'그때'가 돌아왔다. 눈치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다. 평소보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차 문 열어주기, 일정 알려주기, 동선 파악해두고 안내하기 등 모든 업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A그룹 계열 B사 최고경영자(CEO)의 비서다.
24시간이 고달픈 비서들이지만 연말 인사철은 초비상 시기다. 모시는 경영자의 심기가 인사 동향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로 솟기도, 땅으로 꺼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기업 CEO의 수행비서였던 C씨는 이런 일도 겪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난 CEO의 등 뒤로 다가가 코트를 입혀주는데 하필 CEO의 한쪽 팔이 반대쪽 옷소매에 들어갔다. 인사철 한창 심기가 불편했던 CEO는 C씨에게 "자네 날 죽일 셈인가"라며 괜한 화풀이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비서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기운 내시라며 묻지도 않은 한약을 지어오기도 하고 CEO와 단둘이 있을 때 최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꺼내며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 수 있게 배려한다. 인사 전망을 물어오는 사내 동료들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다른 임직원이 괜히 인사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오히려 분위기만 망칠 수 있지만 수행비서는 다르다. CEO와 종일 붙어 있으면서 서로 속내까지 털어놓는 사이기 때문이다. 근엄한 CEO의 역할에 충실하다가도 자신이 믿는 수행비서 앞에서는 약한 모습도, 불안한 마음도 내비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남자의 생애에서 아내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은 비서"라고 말한 이유다.
◇비서의 능력, 무한한 섬세함과 배려=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처럼 보스를 보좌할 수 있는 비서가 최고"라고 입을 모은다. 유능한 비서들은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게 CEO를 배려한다.
한 대기업 비서는 CEO를 찾아온 손님에게 차 한 잔을 내더라도 신경을 쓴다. 방문객의 비서실에 미리 전화해 아침에 방문객이 어떤 차를 마셨는지 확인한 후 다른 차로 준비하는 식이다. 모시는 상사가 자주 가는 식당의 주방장과 친분을 쌓아뒀다가 중요한 날에는 특별 요리를 부탁하기도 한다.
순발력도 남다르다. 특히 외부일정이 많은 CEO는 스케줄에 맞춰 이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예상치 못하게 차가 막히더라도 CEO의 지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황을 봐 시간이 촉박하다 싶을 경우 일부 구간은 지하철로 이동하고 그다음부터 전용차를 이용하는 등의 상황 판단력과 순발력, 능동적인 대처가 중요하다.
입도 무거워야 한다. CEO와 어디든 동행하다 보면 CEO라는 사람 자체와 그를 둘러싼 상황, 그의 인간관계를 알게 될 뿐 아니라 심지어 가장 은밀하거나 사적인 순간까지 목격하는 경우가 있다. 비서는 아니지만 운전기사가 정치인 등의 비리를 제보하거나 증언하는 사례도 종종 들려온다.
김영대 대성산업 회장을 35년 넘게 보좌해온 전성희 대성산업 이사는 "오늘날까지 현역 비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을 신조로 여기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난 1990년대 어느 대기업의 비리 수사 과정에서 핵심 간부들은 검찰의 심문에 못 이겨 입을 연 반면 해당 기업 회장의 여비서는 끝까지 입을 다물어 두고두고 '훌륭한 비서'로 회자되기도 했다.
요즘에는 비서의 외국어 능력도 중요하다. CEO가 해외 출장 중 수행비서와 단둘이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긴 업무시간, 무(無)자유의 고통도=고용노동부 산하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8월 기준으로 전국의 비서 수는 26만명. 이들 대부분은 여성이지만 고위관료·경영인들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수행비서로의 업무 자체가 체력적으로도 힘들어서다.
비서들의 가장 큰 고충은 긴 업무시간이다. 대기업 CEO의 비서 D씨는 "상시 대기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아침 일찍 CEO가 참석하는 행사가 있는 날에는 새벽4시 집을 나서 행사장에서 준비 상태를 점검한다. 일과 후 저녁7·8시께 CEO의 만찬에 동행한다. 물론 만찬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CEO의 일정이 없는 저녁이나 주말이라도 갑자기 급한 지시가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긴장을 풀지 못한다.
CEO가 외부일정을 소화하는 사이 식사를 허겁지겁 해결하는 경우도 많다. 한 정보기술(IT) 대기업 CEO의 비서처럼 "비록 급하게나마 법인카드로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자주 먹을 수 있어서 좋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긴장 상태에서 맛도 모르고 급하게 해치우다 소화 불량에 시달리기 일쑤다. 일정 도중에라도 CEO가 "○○에 대해 알아보라"고 호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서는 보스의 스케줄이 곧 자신의 스케줄이다. 의지대로 시간을 관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샤워할 때조차 전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휴대폰을 비닐봉지에 넣어 가지고 들어간다. 몇 년씩 정신없는 비서 생활을 하다 정작 자신의 가족을 챙기지 못해 가정불화로 고통받는 경우도 생긴다. 지금은 다른 업무를 하는 한 대기업 전직 수행비서 E씨는 "회장님이 새벽5시부터 자정까지 일하는 날도 있었다"며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지 보스는 피곤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수행하는 상사들이 대부분 1분 1초를 쪼개 쓰는 바쁜 이들이다 보니 상사의 가족까지 챙기는 일도 있다. E씨가 겪은 일이다. 하루는 보스의 딸에게 연락이 왔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집에서 통 보지 못하니 아버지와 약속 좀 잡아달라"는 부탁을 해오더라는 이야기다.
◇고진감래 기대하는 비서들=이렇게 힘든 업무에 종사하는 대신 그만한 보상이 주어지는 경우도 많다. 수년의 비서 생활을 끝낸 후 해외 주재원 파견이나 해외 연수, 소위 '잘나가는' 부서로의 배치 등을 기대할 수 있다.
오너의 비서로 오너와 동고동락하는 핵심 비서진의 경우 이후 CEO 자리까지 오르기도 한다. 국내의 손꼽히는 그룹에서 창업주의 수행비서, 오너 2세의 비서실장 등을 거친 후 계열사 CEO를 맡고 있는 F씨가 대표적이다. G그룹 회장을 20년 이상 보좌해온 비서 H씨의 경우 사내 임직원에게 오너 일가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지간한 직급이 아니면 H씨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다.
전문경영인의 비서라도 얻는 것이 많다. 한 대기업 비서실장인 I씨는 "경영 활동의 요체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업무의 우선순위, 의사결정 구조, CEO에게 필요한 결단력과 성실성, 비즈니스 매너 등을 배우게 된다"며 "알게 모르게 최고의 멘토링 기회를 얻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관료 사회에도 비서실을 거쳐 고위직까지 오른 이가 많다. 한덕수 전 한국무역협회장은 한때 고(故) 남덕우 총리의 수행비서였고 진웅섭 금융감독원장은 1980년대와 1990년대 두 차례 장관직에 오른 이규성 전 재무부 장관의 수행비서였다. 하루 종일 얼굴을 마주치며 맺은 관계는 평생 이어진다. 진 원장과 함께 당시 비서실에 몸담았던 최수현 전 금감원장, 윤용로 전 외환은행장, 유지창 유진투자증권 회장, 이우철 전 생보협회장 등은 지금도 이 전 장관과 매년 한두 차례씩 모이며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주희기자 ginger@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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