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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게토 500주년, 새로운 증오가 자란다





1516년 3월 29일, 국가 원수 레오나르도가 주재한 베네치아 의회가 특이한 법령 하나를 통과시켰다. ‘유대인 거주 제한에 관한 법’. 세계 최초로 법으로 강제되는 유대인 거주지역은 곧 베네치아 게토(Venezia Ghetto)라는 이름이 붙었다.

베네치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운하로 갇힌 섬에 격리 수용됐는데, 과연 민족에 대한 차별과 거주 제한은 이때가 처음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동서고금을 통해 외국인 구역은 어디에나 있었다. 전쟁 포로와 그 가족은 물론이고 평시에도 상관(商館)을 중심으로 외국인 집단 거주지가 존재했다.*

‘상인들의 공화국’,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라는 베네치아도 마찬가지. 베네치아는 터키와 독일·페르시아·아르메니아·알바니아·그리스·크로아티아인들의 거주구역을 별도로 운영했다. 특히 그리스와 독일, 터키인 거주구역은 유대인 구역보다 먼저 생겼다. 베네치아 의회는 1314년, 독일인들의 탈세를 막기 위해 한 건물에 집단 수용한 적도 있다.

최초의 격리시설이 아닌데도 베네치아 게토가 특별하게 기억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중세 이후 유대인 박해의 상징이며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는 유대인 뿐 아니라 미국 유색인종 차별을 비롯해 수많은 차별과 격리의 용어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게토’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인연을 끊겠다는 뜻을 통고하는 문서(絶緣狀)’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get’과 채석장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케토’의 뜻이 묘하게 합쳐져 돌을 떼 낸 장소에 유대인을 집어넣어 관리하며 지역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설이 첫번째. 주물공장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게타레에서 파생됐다는 해석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게토=유대인 거주구역’으로 굳어졌다는 점인데 왜 하필 베네치아였을까. 우선 베네치아 게토는 오래 갔다. 나폴레옹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이 1797년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며 유럽 각지에 생긴 게토의 공식적인 원형이 베네치아 게토다. 갯벌에 건설된 물과 운하의 도시답게 격리가 쉬웠던 점도 베네치아 게토의 특징. 다리 두 개만 통제하면 베네치아 게토는 외부와 연락이 끊겼다.

베네치아가 게토 구역을 설정한 이유도 복합적이다. 첫째, 유대인의 숫자가 통제 가능한 수준 이상으로 많아졌다. 1492년 스페인이 유럽의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물리친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직후에 발동한 유대인과 이슬람교도 추방령으로 베네치아에 유대인들이 많아졌다.



두 번째 이유는 유대인 보호. 서유럽에서 가장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던 이곳에서조차 아그나델로 전투 이후부터 반유대 정서가 들끓었다. 1509년 벌어진 아그나델로 전투는 로마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가 등 온 유럽이 캉브레 동맹군이라는 이름으로 베네치아군을 박살 냈던 전투. 패전으로 상실감에 젖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배반한 유대인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노하셨고 전쟁에서 졌다’는 선동이 먹혀들어갔다.

베네치아 공화국 입장에서 유대인을 버리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돈. 유대인들이 내는 특별세금이 아쉬운 마당에 ‘경제와 보호’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조합이 바로 ‘운하로 격리된 섬, 게토’였다. 유대인들은 불만이었어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추방보다는 격리가 나았으니까. 역설적으로 게토는 유대문화를 보다 잘 보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부 랍비들은 베네치아와 통하는 다리가 아예 없어져 완전 차단되기를 바랐다고 전해진다.

결국 일반 대중의 유대인에 대한 멸시와 질시를 막아주고 세금도 받아낼 수 있는 일거양득의 장치인 게토는 전 유럽으로 퍼졌다. 서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전해진 이후 19세기까지 존속하고 러시아와 동유럽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 명맥을 이어나갔다. 유대인의 처지도 크게 바뀌었다. 인구는 여전히 적어 세계의 0.5%에 불과하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4분의1 이상을 배출하고 막강한 자금을 지구촌 정세를 쥐락펴락한다. 어쩌면 유대인의 저력도 보호지이면서도 제약의 장소였던 게토에서 싹텄는지도 모른다.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유대인 게토가 세워진지 꼭 500주년. 오늘날 게토는 완전히 없어졌을까. 그렇다. 적어도 유대인 게토는 사라졌다. 문제는 무수히 많은 게토가 움텄다는 점이다. 역(逆) 게토까지 생겨났다. 뿔뿔이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2,000여년 만에 돌아와 건국한 이스라엘 국가가 자행하는 팔레스타인 차별과 격리는 반 인륜의 수준을 넘어섰다. 21세기 중동의 게토에서는 차별을 자양분 삼아 또 다른 증오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뿐이랴. 뉴욕의 흑인 게토와 한국 땅의 외국인노동자 게토까지, 게토 천지의 세상이다. 마음 속의 게토는 또 어떤가. 지역과 학벌, 소득 수준에 따라 사람이 사람을 구별하는 왜곡된 심리 구조를 어린 아이들마저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 같은 반 친구가 사는 임대아파트의 이름과 거지를 합성해 아무렇게나 ‘휴거’라고 부르는 10살 안짝의 아이들이 그대로 성장한 이 나라의 미래가 두렵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기원전(BC) 4세기가 배경인 플라톤의 ‘국가(Politeia)’도 아테네에 세금을 냈으나 시민권은 없던 거류민 지역의 외국인 ‘케팔로스’의 집이 토론 장소다. 해상왕 장보고가 중국 당나라에 세운 신라방과 신라촌도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이스탄블)이 함락(1453)될 당시에도 제노아인, 라틴인(베네치아인)은 각기 구역에서 거주했었다. 13세기 중반 영국 런던에 조성된 독일 한자동맹 상인들의 거주지이자 무역장소인 스틸야스(Steeelyard)는 19세기까지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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