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같은 무대였다. 20년간 ‘거짓말 같은 비밀, 그러나 가장 진실인 거짓말’로 사람들의 웃음을 빚어 온 일루셔니스트 이은결. 그의 20주년 기념 공연 ‘일루셔니스트 이은결-비욘드 더 트랙(Beyond the Track)’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길거리 공연을 펼치던 고등학생 소년이 국립극장 대극장인 해오름 무대에 서기까지 거듭해 온 고민과 도전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아이들에게조차 마술의 신비함이 사라진 시대, 마술이 죽어갈 때 저는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20년간 써내려 온 일기장을 뒤적이듯, 무대의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2001년 처음 세계 마술 대회에 나가 선보인 추억의 ‘카드·비둘기 마술’로 문을 연 공연은 ‘본 게임은 지금부터’라고 말하듯 현란한 신기술을 쏟아내며 관객의 탄성을 자아낸다.
관객의 입은 시종일관 벌어진다. 선심 쓰듯 순간 이동 마술의 비밀을 공개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알고 보니 별것 아니네’ 하고 자만(?)하는 순간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마술을 선사한다. 장난감 헬기가 순식간에 대형 실물 헬기로 변신하는 장면에선 애어른 할 것 없는 환호성이 터진다. 특히 그가 최근 작가 ‘EG’라는 이름으로 선보인, 조르주 멜리에스를 오마주한 ‘멜리어스 일루션’을 통해 관객은 한 단계 진화된 마술을 맛볼 수 있다. 조르주 멜리어스는 세계 최초의 영화 스튜디오에서 영상 편집을 활용해 트릭 영화를 주로 만든 인물이다. 무대와 무대를 비추는 영상이 혼합된 멜리어스 일루션에서는 현실이 영상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영상이 현실로 튀어나오는 독특하고 실험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객석의 열기가 한껏 고조된 순간, 반전 같은 ‘마지막 무대’가 펼쳐진다. 미녀도, 앵무새도, 거대한 세트도 없다. 이은결은 오로지 두 손, 열 개의 손가락으로 아프리카 대자연을 빚어낸다. 슬럼프에 빠졌던 그에게 새로운 영감과 용기를 안겨 준 아프리카. 그곳에서 이은결이 얻은 ‘환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화려한 기술에 있지 않았다. 이은결이 이 손 그림자 공연을 왜 마지막에 넣었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믿는 사람은 매직(마술)이라 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트릭(눈속임)이라고 한다. 무엇이 됐든, 현실 속 거짓말에 무감각해지는 많은 이들에게 이은결이 선사한 140분의 무대는 그 자체로 깨고 싶지 않은 환상, 일루션이었다. 15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사진=(주)이은결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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