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1월 세계 최대 해운사인 덴마크 머스크라인이 홍콩 항만당국에 항의를 전달했다. “홍콩에 입항하는 다른 해운사들에 친환경 규제를 적용하라”는 요구였다. 머스크가 홍콩의 친환경 정책에 따라 오염물질 배출이 적지만 보다 비싼 연료를 사용하는데 다른 해운사에도 이를 강제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세계적으로 환경 규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친환경 선박을 선점한 세계 1위 해운사가 후발주자들이 추격해오는 ‘사다리’를 치워버리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일화다.
글로벌 해운업계 선두주자들이 이처럼 초대형 친환경 선박을 선제적으로 끌어모으면서 해운업계는 국내 최대 해운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앞길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는 비관론을 제기하고 있다.
세계 각국이 환경 규제를 강화하면서 머스크라인 등 선진 해운사들은 이에 발맞춰 친환경 고효율 선박에 집중 투자하는데 생존에 급급한 한국 기업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이런 흐름을 감안해 정부와 금융계가 나서서 해운업계의 친환경 선박 투자를 돕고 조선 업체들의 수주 갈증을 해소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일반적으로 조선업계는 2012년부터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국내 주요 조선사가 수주한 컨테이너선을 친환경 고연비 선박으로 규정한다. 머스크라인이 2011년 대우조선해양에 발주한 초대형 컨테이너선의 경우 기존 대비 연료 절감은 20%, 이산화탄소 배출 효과도 30%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된다. 머스크라인과 CGM·코스코·하팍로이드 같은 글로벌 해운사 상위 13곳(선대 규모 기준)이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국내 빅3 조선사에 발주한 친환경 고연비 선박은 총 79척이다. 반면 같은 기간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발주한 신규 컨테이너선은 전무하다.
2020년 저유황연료 의무화땐 추가비용 불가피
정부·금융권 앞장서 선박 발주 지원 서둘러야
더욱이 대형 해운사들은 아예 오염물질이 적은 액화천연가스(LNG)나 국제 규제에 맞춘 저황 연료로 운항할 수 있는 최신 선박 투자를 통해 다른 해운사들과의 차별화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오는 2020년께부터 전 세계 공해를 운항하는 선박들은 황 함유량이 3.5%인 기존 중유(HFO) 대신 0.5% 미만인 저유황연료(LSF)를 사용해야 한다.
이에 업계는 이르면 2018년부터 저유황연료나 LNG를 연료로 사용하는 컨테이너선에 대한 발주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미 대우조선해양의 기술로 만든 3,000톤급 LNG 추진 컨테이너선이 지난해 10월 미국에서 진수된 바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한 글로벌 대형 해운사는 최근 ‘LNG 레디’라고 명명한 대형 LNG 추진 컨테이너선의 발주를 국내 조선소와 논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러한 차별화 전략은 신규 선박은 엄두도 못 내는 국내 해운사들에 큰 장벽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친환경 규제에 발맞춰 선대 최신화를 이루지 못하는 해운사들은 규제 발효가 본격화하는 2020년부터 비용 상승에 따른 치명타를 입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규제 발효에 따라 전 세계 해운업계에 발생할 추가 비용은 최대 300억달러(약 35조4,300억원)로 추산된다. 이 비용의 대부분은 에너지 고효율 선박을 도입하지 못한 해운사들이 떠안게 된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힘겨운 구조조정을 통과한다 하더라도 경쟁력에 심대한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인 셈이다.
이런 가운데 해운·조선업계 관계자들은 해운업계가 지금부터라도 친환경 고효율 선박 투자를 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는 수주 가뭄에 시달리는 국내 조선업계에도 단비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대우조선을 비롯한 한국 빅3 조선 업체들은 LNG선 같은 친환경 선박에 특화돼 있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방안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에코십을 비롯해 친환경 조선에 대한 기술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만큼 정부도 지원을 친환경 선박 쪽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해운업계의 한 전문가는 “이미 글로벌 해운사들은 자신들의 독점적 지위를 견고히 하기 위해 국제해사기구(IMO) 회의 등에서 친환경 규제를 더욱 강력히 적용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며 “정부와 금융권이 나서서 국내 해운사들의 신규 선박 발주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혁기자 2juzs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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