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또다시 ‘재정역할론’을 주문했다. 이번에는 정부의 재정 여력이 충분하다는 구체적인 근거까지 내밀었다. 정부가 신줏단지 모시듯 재정 건전성을 고집하는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반면 기준금리 인하 카드는 아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시장에서는 한은이 조선·해운업 구조조정 여파로 거세질 수 있는 금리 인하 압력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총재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귀빈식당에서 열린 경제재정연구포럼 초청 조찬강연에서 “건전한 재정을 바탕으로 경기 부진을 타개하고 고용을 증가시키는 데 재정이 역할을 할 만큼 (충분한) 여력을 가지고 있다”며 “장기적으로 재정 건전성 유지도 중요하지만 단기적으로 이런 역할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총재는 근거로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를 제시했다. IMF는 2014년 기준 우리나라의 재정 여력이 241.1%포인트라고 분석했다. 재정 여력이란 지속 가능한 국가채무 최대치와 현재의 국가채무 수준과의 차이를 산출한 것이다. 이렇게 산출된 우리나라의 재정 여력은 주요국가 중에서 노르웨이(246.0%포인트)를 제외하면 가장 높았다. 또한 미국(165.1%포인트), 영국(132.6%포인트), 프랑스(116.9%포인트) 등 선진국은 물론 재정 건전성을 앞세워 유럽연합(EU) 국가의 긴축정책을 주도해온 독일(167.9%포인트)과 비교해도 재정 여력이 월등히 높았다.
이 총재는 그러나 기준금리 인하 카드는 아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로(0%)금리’는 불가능하다고도 했다. 그는 “통화정책은 시간만 벌어주고 과도한 완화정책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게 각국 중앙은행 총재들의 똑같은 얘기”라며 “우리나라는 제로금리까지 갈 수 없는 한계가 있고 구조조정을 뒷받침하려면 통화정책의 여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총재는 지나치게 완화적인 통화정책이 가져올 수 있는 금융 불균형으로 금융기관의 위험자산 확대 및 유동성 위험 증가, 가계 및 기업의 부채 확대 등을 언급했다. 이 총재는 그동안 금리 인하 압력이 거세질 때마다 기준금리가 ‘하한선’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방어해왔다. 다만 향후 기준금리 정책 방향에 대해서는 “성장과 금융안정, 기대효과 등을 고려해 적합한 정책을 찾겠다”며 말을 아꼈다.
이 총재는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 제고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을 3% 내외로 보고 있다”며 “성장률을 결정하는 세 가지 요인 중 노동과 자본의 투입은 인구 고령화, 투자 감소 등으로 한계가 있는 만큼 잠재성장률을 높이려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출산율 하락을 심각한 문제로 꼽으며 “인구 문제를 풀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안정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재정과 통화정책에 발맞춰 부진한 구조개혁의 고삐를 당겨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 총재는 “선진국의 경우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시적이고 순환적인 문제라고 오판해 재정·통화정책만 쏟아부어 여력이 고갈된 상태”라고 지적하며 “구조개혁 없이 재정·통화정책만으로는 경제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우리나라에서 구조조정의 핵심은 경제의 비효율성을 제거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정부와 국회가 구조조정의 주체가 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날 경제재정연구포럼에는 여야 의원 30여명이 참석했다. 경제재정연구포럼은 김광림 새누리당 의원과 장병완 국민의당 의원을 공동대표로 지난달 출범한 국회의원들의 연구 단체다.
/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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