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에 몰락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던 1905년 9월. 한성에 있는 모든 집에 미국 성조기가 달렸다. 국제 외교가에서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유력 정치인들을 이끌고 대한제국을 방문한 것. 대한제국으로서는 그에게 잘 보여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 견제에 나서도록 해야 했다. 앨리스에게 황실 가마를 제공함은 물론 그가 홍릉에서 명성왕후 묘를 수호하는 말 석상에 걸터앉는 무례를 범해도 꾹 참아야 했다. 일본 천왕과 청의 서태후를 직접 만날 만큼 영향력이 컸던 그였기에 더욱 그랬다. 미국이 이미 두 달 전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기기로 비밀 합의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영국 워릭대 앤드루 오스왈드 교수는 “딸의 존재가 아버지의 정치적 견해를 변화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래서일까. 유명 정치인들 옆에는 딸의 모습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클린턴 부부는 외부 행사가 있을 때 꼭 외동딸 첼시를 데리고 다녔고 공화당 대선주자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 역시 경선에서 딸 매건의 도움을 받았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총선 때 여당 텃밭인 대구에 야당 깃발을 꽂은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선거 유세 지원에 나선 셋째 딸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고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은 딸 덕분에 ‘국민 장인’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시간이 갈수록 정치판에서 딸의 영향력은 커지는 모양새다.
힐러리 클린턴 미 민주당 대선후보의 딸 첼시가 최근 미국 NBC 방송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딸 이방카와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오래된 친분을 바탕으로 두 선거캠프의 과열을 진정시켜 극단적인 분열로 가는 것은 막자는 생각일 터. 이미 민주 공화 양당 전당대회의 마지막 날 찬조연설자로 나서 최고의 스타로 부상한 두 딸이다. 일부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들 중 한 명은 앨리스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대통령의 딸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정치판의 유리 천장은 더 낮아질 것 같다. /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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