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병은 빨리 발견할수록 쉽게 치료된다. 일례로 조기 위암의 완치율은 97%에 달하는 반면 말기의 5년 생존율은 5.8%로 급감한다. 폐암 역시 초기와 말기의 생존율이 20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하지만 모든 병을 정확하게 조기 진단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경험과 정보가 한정된 의료진이 환자가 보이는 몇몇 증상만을 보고 1만여 가지가 넘는 질병 중 하나를 골라내는 현재의 진단 방식으로는 실수와 혼란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방대한 의료정보를 축적·처리하는데 한계가 없는 인공지능(AI)의 등장은 세계 의료진에게 좀 더 빠르고 좀 더 정확한 진단의 꿈을 꾸게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IBM이 선보인 종양학 진단 전문 시스템 ‘왓슨 포 온콜로지’다. 사람이 제아무리 노력해도 매년 70만 건 이상 쏟아지는 종양학 관련 논문들을 모두 습득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AI라면 해낼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서 착안한 프로젝트는 2012년 시작된 지 불과 4년 만에 세계 50개 종합병원에 진출, 암 환자를 진단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천 길병원과 손을 잡고 10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왓슨의 능력은 놀라울 정도다. 미국종양학회의 2014년 발표에 따르면 왓슨의 진단 일치율은 △대장암 98% △직장암 96% △방광암 91% △췌장암 94% △난소암 95% △자궁경부암 100% 등에 이른다. 전문의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질병을 왓슨이 정확하게 찾아 생명을 구한 사례도 나왔다. 지난 8월 일본 연구진은 도쿄대병원에서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치료 중이었지만 별 차도를 보이지 않았던 한 60대 환자를 왓슨에 맡겼다. 왓슨은 약 10여 분만에 환자의 병이 ‘2차성 백혈병’에 가깝다는 진단을 내리고 항암제를 바꾸도록 권고했으며 그 결과 환자는 극적으로 좋아졌다고 한다.
AI 진단은 뇌·정신과적 영역에서 더욱 빛을 발할 전망이다. 인간 지각이 미처 감지하기 어려운 세밀한 행동·대화 패턴을 AI가 관찰·분석하도록 함으로써 알츠하이머나 자폐증 등을 조기 진단할 수 있다는 연구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지난달 캐나다 토론토대 연구팀은 노인들의 대화 패턴을 분석해 알츠하이머에 걸릴 가능성을 예측하는 로봇 ‘루드비히’를 공개했다. 키가 61㎝인 이 로봇은 노인들의 대화 속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의 간격이 길어지는 현상이 포착되면 특정 언어 기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해당 뇌 부위에 대한 빠른 치료를 권한다. 영국과 폴란드의 공동연구진은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 아이들의 손가락 움직임을 관찰·분석함으로써 93% 정확도로 일반 아동과 자폐 아동을 구별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진단 방식이 자리 잡을 경우 그동안 숙련된 전문가의 장기간의 관찰 끝에야 겨우 진단이 내려졌던 정신과적 질병 진단의 패러다임이 크게 바뀔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경미기자 km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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