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을 앞두고 정부세종청사에는 업계 관계자 등 민원인의 발길이 뚝 끊어져 적막감마저 감돌고 있다. 안내데스크에서 방문증을 교부 받은 업계 관계자들이 로비에서 공무원을 만나 명함을 주고받는 모습도 이제는 진풍경이 됐다. 그렇다 보니 각 동마다 1층에 민원인과의 상담 등을 위해 마련된 부스도 늘 텅텅 비어 있는 지경이다. 청사의 한 보안요원은 “그동안 방문객이 공무원들에게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가져온 떡 등의 음식물을 검색대에 통과시키려 하면 소지품이 든 가방만 넣으면 된다고 안내를 하곤 했다”며 “하지만 최근에는 공무원을 만나러 오는 이들 자체가 거의 없이 이런 안내조차 할 필요가 없게 됐다”고 말했다.
그나마 오해의 소지가 적은 청사 내부에서의 업무 분위기는 나은 편이다. 인근의 대표적인 ‘오얏나무’로 손꼽히는 식당에서는 ‘갓끈’조차도 고쳐 매지 않으려는 상황이다. 우선 식당으로 향하며 청사를 벗어나자마자 목에 걸려 있는 신분증을 빼서 호주머니에 꽂아 넣는 공무원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A 부처의 한 국장은 “내부 지침을 봐도 걸리는지 안 걸리는지 헷갈리는 부분이 있어 실제 법원 판례가 나올 때까지 모두 숨죽일 것”이라며 “‘란파라치’가 모두 세종시로 몰려 온다는 얘기도 있지 않느냐”고 전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죽하면 “밥 먹었나”처럼 “김영란법 시행 이후 약속 잡은 게 있나”라고 묻는 게 안부 인사가 될 정도다.
식당 앞에 비치된 예약자명 보드에서 부처 및 부서명이 기재돼 있는 것도 이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한효주·공유 등 연예인들의 이름이나 의도적으로 오기한 듯 보이는 성명이 오히려 더 많이 보일 정도다. B부처의 한 사무관은 “식당에 예약을 하려고 전화를 했더니 무슨 나이트클럽도 아니고 그쪽에서 먼저 연예인명으로 하라고 조언했다”며 “접대와는 전혀 무관한 식사 자리를 위해 식당 예약을 하는 데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쓴웃음이 나왔다”고 말했다. 불과 이달 초까지만 해도 청사 근처 식당가 예약자명 보드에는 사람 이름보다는 부처·부서·기관·업체명 등이 기록돼 있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따금 김영란법 시행 이전 날짜로 몰아 잡은 식사 자리에서도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최근 중앙부처의 한 고위공무원은 업계 관계자들과 식사를 하다 도중에 멈춰 주위를 당혹스럽게 했다. 2만5,000원짜리 정식을 시키고 반주를 곁들이다 “지금부터 더 시키면 3만원이 넘는다”며 “술은 더 이상 안 된다”고 식사자리를 마감한 것이다. 김영란법 시행 전이지만 꼬투리가 잡힐 만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해 그런 것이라는 게 동석자들의 설명이다.
C부처는 그동안 현안에 대한 브리핑 직후 가졌던 언론과의 오찬 행사를 앞으로 진행하지 않을 예정이다. 전체 언론을 대상으로 한 공식 식사 자리는 김영란법의 적용 대상이 되지 않지만 일단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는 게 해당 부처의 입장이다. D부처 이외 다른 부처들은 공식 행사의 경우 괜찮다는 권익위원회의 유권해석을 바탕으로 식사 자리는 지속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지만 어느 부처도 선뜻 28일 이후의 행사 일정은 잡지 못하고 있다.
부서의 업무상 외국인들과 만남이 잦은 공무원들은 곤혹스러운 상태다. 보통 해외 당국자·기업인들과 만나면 선물 제공이나 식사 대접 등을 ‘기브 앤드 테이크’ 형식으로 서로 엇비슷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이 같은 주고받기가 자칫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온 국민의 화두가 김영란법이 돼 있는 상황에서 한국인에게는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외국인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는 게 D부처 한 과장의 전언이다. /세종=임지훈·박홍용·구경우기자 jhlim@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