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발명가 정신을 변변치 않은 부엌 쓰레기 통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프랭크 양은 바로 그런 일을 해냈고, 새로운 장르도 개척했다. 그는 가장 평범한 가정 용품에 당당한 기풍과 스테인리스 스틸을 담아 제품을 재창조했다.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양(44)은 벼룩 시장에서 부친을 도우며 처음 사업을 배웠다. 그가 설립한 심플휴먼은 현재 물비누 펌프와 최첨단 화장 거울-사용자가 거울에 접근하면 자동적으로 불이 켜지는 센서가 부착되어 있다-등을 판매한다. 지난해 회사 매출은 1억 5,000만 달러였다. 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대만에서 자랐다. 사람들이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뭔가를 발명해서 판매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어렸을 땐 자동으로 개밥을 주는 기계와 주전자가 올려져 있지 않으면 알아서 꺼지는 스토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열 살 때 우리 가족은 LA로 이민을 왔다. 부친은 수입상 일을 했다. 초반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우리는 물물장터에서 아버지 회사의 사장재고(dead inventory)를 팔았다. 우리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의자용 쿠션이나 맥주를 차갑게 넣어 마시는 잔 등을 판매했다. 나는 그 때 상품 진열 노하우와 스페인어로 상품을 설명하면서 협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항상 무언가 수리하는 일을 잘했다. 우리는 7학년 때 동네에서 원격으로 조정하는 드래그 레이싱 drag racing (*역주: 자동차 경주 게임) 을 하곤 했다. 그 중에는 심술궂은 부잣집 아이도 있었다. 나에겐 비싼 장난감 자동차를 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저렴한 제품을 고쳐서 섀시와 핸들을 바꾸고 자동차를 더 가볍게 만들었다. 추가 배터리를 탑재하기도 했다. 자동차가 썩 멋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해서 그 부잣집 아이를 이길 수 있었다.
나는 UCLA에 진학해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정치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인지에 대해선 확신을 하지 못했다. 지금의 아내가 된 당시 여자친구는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산업 디자인 수업을 듣자고 했다. 산업디자인을 무척 좋아했지만, 전공을 바꾸기엔 시점이 너무 늦은 상태였다.
대학 졸업 후 나는 부친 회사에서 일을 했다. 나는 물건을 떼오는 일을 맡았다. 그 과정에서 공급망에 대해 배웠고, 제조업체를 상대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답답함을 느껴 그 일을 그만뒀다. 나는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디자인해서 판매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회사 사정이 좋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창업비용 20만 달러를 대주셨다.
내가 가정용품에 관심을 가진 건 2000년의 일이었다. 당시 값만 비싸고 볼품없는 스테인리스 스틸 휴지통들이 커다랗게 전시돼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 제품들은 저렴한 플라스틱 제품보다 기능성도 훨씬 떨어졌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가정용 제품의 디자인에 큰 관심이 쏠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모든 집에는 휴지통이 있다. 정말 멋진 쓰레기통을 디자인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리랜서 산업 디자이너 몇 명과 직원 한 명을 고용했다. 우리는 휴지통 페달을 더 가볍게 만들고, 통 안의 악취도 잡아내고, 보기에도 멋진 제품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와 거래를 하고자 하는 제조업체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러다 대만에서 왕 딩처우 Wang DingChou가 운영하는 작은 공장을 찾아냈다. 우리는 6개월 동안 팩스로 디자인을 주고 받으며 시행착오 끝에 시제품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제품을 들고 시카고 국제가정용품 박람회로 향했다. 타깃 Target과 컨테이너 스토어 Container Store 바이어들이 그 제품을 마음에 들어 했다. 우린 컨테이너 스토어로부터 3만 달러, 타깃으로부턴 시험 주문을 받을 수 있었다.
작업하기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공구 세공이었다. 이 작업은 제조용 부품과 기계를 잘 관리하는 프로세스로, 산출, 품질,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였다. 왕이 휴지통을 한 무더기 제작했을 때, 내가 전 제품을 퇴짜를 놓은 적도 있었다. 그가 나와의 작업을 거의 포기하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제조업체들이 늘 빠른 속도와 낮은 가격에 치중하고 있을 때, 나는 높은 품질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래서 그와 함께 해당 공구사를 찾아갔고,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첫 해에 약 8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내가 직접 소매업자들에게 전화를 돌려 영업을 했지만 대부분은 답신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기회가 찾아올 때 대비해 그것을 붙잡을 수 있는 준비는 되어 있어야 했다. 나는 로 Lowe의 바이어에게 휴지통 샘플 몇 개를 보냈던 기억이 있다. 그는 바로 다음날 내게 전화를 걸어와 함께 거래하던 다른 회사가 폐업했다고 했다. 그리곤 “이야기를 좀 하자”고 말했다.
우리 회사명은 원래 캔웍스 Canworks였다. 우리는 바이어들이 더 많은 상품들을 원하자 행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사명이 잘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우리 제품을 사용할 때 효율성을 느끼길 원했다. 우리는 작명 자문가들과 논의를 했고, 그들은 심플휴먼이란 이름을 고안해주었다.
그 후 소매업체들이 우리에게 욕실용품까지 사업을 확장할 것을 제안해왔다. 그래서 2010년 욕실 액세서리를 출시해왔다. 대나무 각티슈 케이스를 만들었지만 실적은 좋지 않았다. 우리 제품은 그저 수많은 선택지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때 우리가 모든 것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연구 개발과 해당 제품 라인을 위한 공구 세공에서 75만 달러의 손실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욕실 제품에 집중했고, 마침내 센서 거울과 물비누 펌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나에게 이런 일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작업이었다. 우리는 물비누 분배기에서 0.5초 내에 비누가 나오도록 제품을 설계했다. 그 때 엔지니어 한 명이 “시간을 0.2초로 맞출 수 있다”고 말했고, 나는 “좋다. 그렇게 해달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자”고 말했다. 내가 0.2초로 맞춰진 분배기 아래 손을 대자, 바로 비누가 나왔다.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인간의 시각적 자극물에 대한 평균 반응 시간은 0.25초다. 무언가가 0.25초 내에 일어난다는 건 마법에 가까운 일임에 분명하다. 이런 성과는 당신이 ‘이만하면 됐다’ 정도에 만족하지 않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스마트한 사람들을 위한 일터 만들기]
심플휴먼 창립자 겸 CEO 프랭크 양
나는 건강과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심플휴먼에선 개인들이 각자의 근무시간을 정할 수 있다. 멋진 제품을 만들기 위해 회사에 나와 있지만, 가족 사정 때문에 퇴근해야 한다면 그냥 가면 된다. 자녀의 봄방학 기간에 휴가를 가지 못할 경우, 아이들을 회사에 데려올 수도 있다.
우린 사옥 한 가운데 농구장과 체육관을 갖고 있다. 이곳에서 정오 요가 수업, 금요일 오후 크라브 마가 Krav Maga( *역주: 다양한 격투기를 종합해 만든 현대 무술) 수업, 업무 시간 이후 농구 경기 등을 할 수 있다. 직원들은 제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농구를 하기도 한다.
우린 매주 화요일 점심에 셰프를 초대해 건강식을 만들어 준다. 매주 금요일에는 여러 가지 전통 음식에 기반한 아침 식사를 제공하기도 한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직원들에게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함께 모여 회사 동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물론 매일 즐기고 노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직원들이 보다 더 자유롭게 논의하면서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같은 농구 팀의 동료와 회의실에서 논쟁하는 것에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다. 우리 회사는 이직률이 상당히 낮은 편이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Interview by Dinah 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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