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소셜미디어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사축일기’ 속 단편소설 ‘영업2부 표류기’다. 능력은 없는 주제에 대접만 받으려는 부장, 거기에 아부하는 차장, 연애에 정신이 팔린 과장과 막내 (인턴)사원의 모습은 누구나의 직장에 한 명씩은 있을 법한 인물들. 이들이 처한 상황은 극적이지만 우리가 ‘살아낸’ 어제, 그리고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다수는 ‘회사생활이 표류’라는 구절에 무릎을 탁 친다. 회사에 길들여진 가축이라는 ‘사축’이라는 표현부터가 웃프다(웃기면서 슬프다는 신조어).
이 책을 쓴 이는 시인 겸 가수 강백수(28·본명 강민구) 씨다. 직장생활이라곤 1년 남짓 종합학원에서 강사 일을 해본 게 다인 그가 사원부터 부장까지 공감할만한 직장인 이야기를 써낸 점이 아이러니했다. 특히나 이름이 백수라니(그는 2010년 데뷔 때부터 강백수라는 이름을 썼다).
‘우리 회사의 7대 불가사의(아래 참조)’ 등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글귀들을 가감 없이 쓴 그의 주무기는 술과 공감능력. 월급쟁이인 그의 친구들은 술 한잔이면 오늘 하루 그들이 회사에서 부딪혔던 난관, 고민, 그리고 가장 미운 상사와 후배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장삼이사의 하소연이 강백수를 거쳐 ‘직장인류’ 보편의 이야기로 다듬어졌다.
25일 서울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직접 만나본 강 씨는 그가 쓴 책과 노래만큼이나 진솔하고 담백했다. 강 씨는 “대중을 불완전한 존재로 보고 ‘모든 고통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느니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느니’ 훈계하는 서점가 풍조가 정말 쓸데없게 느껴졌다”며 “당신들은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회사가 거지 같은 건 당신이 못 나서가 아니라 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왜 뮤지션이 됐느냐고, 왜 시인이 됐느냐고 묻지 않았다. 2년 전의 이 영상을 보면 이미 그의 답이 나온다. 1집 앨범 <서툰 말> 중 <하헌재 때문이다> <타임머신> <벽>이라는 곡도 덤으로 즐길 수 있다.
-왜 이름이 백수인가.
“두 가지다. 대학 시절 우리과 교수님(그는 국문학도다. 현재 모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이 천방지축 뛰어노는 나의 모습을 보고는 ‘공무도하가’의 백수광부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두 번째는 우리 사회에서 뮤지션에 대한 이미지가 백수건달과 다를 바 없다. 직장인들이 자조 섞인 표현으로 스스로를 사축이라고 하듯 나도 스스로를 백수라고 해봤다.”
-신간 ‘사축일기’에 대한 반응이 뜨거운데.
“사람들은 저마다의 푸념을 하고 싶은데 우리 사회는 푸념하면 못났다고 규정해버리는 것 같다. 푸념하지 말고 극복하라고 한다. 그런데 사축일기는 푸념하고 싶은 욕구를 대리만족시켜준 것 같다. 최근 지인으로부터 이런 피드백도 받았다. 사축일기를 읽으면서 내내 자기 사수가 떠올랐고 실컷 욕을 하며 읽었는데 다음날 출근해 보니 그 사수도 사축일기를 읽으며 공감하고 있더라는. 우리는 모두 ‘나는 그런 사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얄미운 사수도 본인 역시 가엾은 사축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래서 사축일기를 말단 사원이든, 대리든, 과장, 차장이든 공감하는 것 같다.”
-취재는 어떻게 했나.
“나는 어떤 세계관을 치밀하게 그려낼 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아티스트가 아니다. 이제 내년이면 서른. 책 한 권과 앨범 한 장을 냈더니 밑천이 다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워다 써야 하는 형편이 된 거다. 출판사 ‘자음과모음’에서 ‘사축일기’를 써보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방심할 수 있는 취재원들을 모았다. 일부러 평일 저녁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나의 취재는 이렇게 시작된다. ‘지금부터 제일 재수없는 놈을 집어봐.’ 그러면 사냥감이 먹잇감을 향해 질주하듯이 허겁지겁 물어뜯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 내가 한 일은 소재를 모으고 보편화한 것뿐이다. 제삼자의 시각에서 보니 더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작가 스스로 가장 공감했던 이야기를 꼽는다면.
“종합학원 강사로 일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고 지금 역시 을로서 계약서에 사인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나도 또 다른 형태의 사축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 어디든 일하는 사람이 있고 갑과 을이 있다면 직장이라는 말이다.
딱 한 가지 내 이야기를 쓴 것이 있다. ‘노인과 바다’를 패러디한 ‘사원과 바다’다. 어부 산티아고는 바다에 나간 지 30일째 되던 날 ‘급여일’에 도착하고 마침내 ‘급여’ 한 마리를 낚는다. 그러나 집주인 아줌마가 방세라는 명목으로, 한국장학재단이 학자금 대출 원리금으로, 카드사에서 카드할부금으로 급여를 습격한다. 산티아고에게 남은 건 통장에 남은 흔적뿐이다. 나 역시 저작권료나 출연료가 모두 통장을 스쳐 사라진다.”
-책의 후반부 소설 두 편(영업2부 표류기, 시간을 달리는 신입사원)이 인상 깊었다.
“‘영업2부 표류기’의 경우 계급장을 떼고 싶은 욕망과 실제로 그 욕망이 이뤄진 상황을 그려보고 싶었다. 계급장을 떼도 상사는 그 상황을 인정 안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 계급장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하던 대로 복종하는 캐릭터가 있고 또 그에 저항하는 캐릭터가 얽히며 아비규환이 된 상황을 그렸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현실로 돌아온다. 아비규환의 끝이 명쾌한 해피엔딩이 되긴 어려운 거다. ‘시간을 달리는 신입사원’은 상사에게 깨지지 않기 위해 ‘타임워프(시간을 되돌리는 것)’를 반복하는 한 말단 직장인의 얘기다. 수 없이 상황을 되돌리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그는 결국 ‘깨지고 만다’. 이 소설은 ‘어쩌라고’ 한 단어에서 시작했다. 흔히 우리가 받는 월급에는 ‘견디는 대가’가 포함돼 있다고 하지 않나. 그 상황을 그려보고 싶었다.”
-‘나의 5년, 10년 후 모습이 끽해야 내가 욕하고 있는 상사’라는 답답한 현실을 그린 데 대해서도 많은 직장인이 공감하는 것 같다.
“직장 다니는 친구들에게 내가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적어도 너희는 5년, 10년 후 어떤 모습일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친구들이 그러더라. ‘너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아느냐’고.”
-사축일기를 보며 공감하고 또 용기를 얻을 수많은 사축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직장인이나 대학생들, 대중들을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하는 풍조가 서점가에 있는 것 같다. ‘당신은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 원인이 당신에게 있어. 당신은 이렇게 달라져야 해.’ 나는 그런 얘기들이 정말 쓸데없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은 충분히 잘하고 있다.’ ‘회사에서 거지 같을 수 있지만 결코 당신들이 못 나서가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회사가 문제’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친구들이 야근을 안 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이 근무시간 동안 할 수 없는 일이 주어지고 결국 야근을 해서 끝내야 한다면 그건 잘못 된거다. 사람을 더 뽑아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회사는 이걸 그 사람의 문제라고 하고 사회는 좀 더 노력하라고 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강 씨는 “(시인이자 가수로서) 본업을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시를 꾸준히 쓰고 있고 새 음반은 내년 봄을 기약하고 있다. 직장인이 공감할만한 산문집을 냈으니 다음에는 군인들이 공감할법한 군대 이야기도 쓰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최근 발표한 그의 디지털 싱글 앨범 <남자사람> 그가 짝사랑한 그녀는 반지하 자취방으로 남자를 불러 놓고 연신 소주만 홀짝이며 “오빤 언니 같아서 좋다”고 말한다.
-책 출간 직후 ‘남자사람’이라는 제목의 디지털 싱글 앨범을 발표했다. 반응이 어떤가.
“기존에는 강백수라는 청춘(좋아하지 않는 단어라고 거듭 강조했다)을 이야기하고자 했다면 이번 앨범에서는 강백수라는 남자를 얘기해보고 싶었다. 좋아하는 여자의 지난 남자들 이야기나 들어주면서 자신은 고백도 못 하고 욕망을 짓누르는 남자. 그런데 지금 심의통과를 못 했다. 어떤 내용이 문제인지도 알 수 없다. 1집 앨범에서도 딴따라, 오뎅 같은 단어가 순화돼야 할 비표준어라며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 단어들은 몰라서 쓴 것이 아니고 대체할 수 없는 단어라고 판단해서 쓴 거다. 오뎅과 어묵은 들었을 때 우리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다르다. 딴따라와 뮤지션도 마찬가지다. 트레이닝복을 입다 보면 늘어나서 츄리닝이 되고 슬리퍼를 오래 신으로 쓰레빠가 되는 거다. 심의 자체가 기준이 없다. 명확한 규정이 있다면 그에 맞춰 창작하는데 어떤 잣대로 판단했는지 알 수조차 없으니 답답하다.”
▲불효자가 되고 싶지 않지만 불효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라면 들어볼만한 강백수밴드의 노래 <타임머신> 뮤직비디오.
/서은영기자 supia927@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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