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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에] 썰물의 시대

정상범 논설위원

美·英…성장없는 세상 분노 만연

부패 속살 드러난 한국은 더 참담

'리더십 실종' 과도기적 혼란 딛고

정치권, 국민 중심 새 시대 맞아야





몇 해 전 가족들과 함께 1년간 미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당시는 9·11테러 직후라 흔히 얘기하는 인종차별이라도 받을까 적잖이 걱정을 했다. 하지만 막상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눈에 띌 만큼 인종차별의 분위기를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주말이면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공짜 파티를 열어주고 여행을 하다 길잃은 동양인에게 따뜻한 저녁을 대접하는 후한 인심에 감동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 생활 내내 백인들의 속마음은 과연 어떨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이방인들을 대하는 온화한 미소가 혹시 인종차별을 죄악시하는 강압적인(?) 사회적 분위기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대선의 판세를 갈랐다는 이른바 ‘샤이 트럼프(Shy Trump)’ 얘기를 듣고 옛 기억을 떠올리게 됐다. 제조업이 쇠락한 러스트 벨트(RustBelt)에 살고 있는 백인 남성들이 여론조사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채 막판에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에게 몰표를 던져 이변을 연출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남동부 애팔래치아 산맥 주변의 백인 촌뜨기를 ‘힐빌리(Hillbilly)’라고 부른다. 이들은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계 후손으로 미국에 정착했지만 좀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계층이다. 변변한 학위도 없는데다 가족이나 친구들도 힐빌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결국 힐러리 클린턴 같은 기존 엘리트 계층에 과감히 등을 돌렸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런 정서 밑바탕에는 바로 미국 경제의 극심한 양극화 현상과 성장 정체에 따른 불안감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은 성장이 멈추면서 밥그릇 싸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 2000년대만 해도 5% 안팎이던 세계 실질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3%로 낮아졌고 앞으로 더 낮아질 게 뻔하다. 성장이 없는 세상에서는 부의 재분배보다는 밥그릇 싸움이 더욱 치열하게 벌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터에 트럼프 시대를 맞아 글로벌 통화 전쟁이나 보호무역주의의 파고가 거세게 휘몰아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때아닌 속죄양 찾기 현상이 빚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과정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이 널리 퍼진 것이나 트럼프의 월가 때리기, 불법이민 단속은 단적인 예다. 세계화에 따른 불평등으로 발생한 반세계화와 고립주의는 지구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그런데도 기성 정치권이 처방전을 제시하기는커녕 이를 선동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눈을 돌려 한국의 정치상황을 보면 더욱 참담할 따름이다.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거대한 부패 구조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국민들의 거센 분노를 사고 있다. 기득권의 이권 개입과 특혜 입학 의혹 등이 매일같이 터져 나오면서 시국집회를 고교생과 취업준비생이 주도하고 있다는 분석마저 나오는 판국이다. 오죽하면 수능시험이 끝난 후 고3 수험생들이 주말 시국집회에 대거 등장할 것이라는 얘기마저 나올까 싶다. 민주주의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지만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일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썰물이 빠져나가며 처참하고 흉물스러운 밑바닥을 고스란히 드러낸 모양새다. 썰물은 자칫하면 바다에 해일을 일으키고 선체까지 침몰시킬 수도 있다. 이런 최악의 사태를 막자면 기존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과 불신이라는 우리의 민낯을 인정하고 땅에 떨어진 정치 리더십을 되찾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지금은 국민들 사이에 비관과 분노만 만연할 뿐 진정한 대안을 찾지 못하는 아노미 시대다. 하지만 썰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밀물이 새로 들어오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과도기적 혼란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파적 이익에서 벗어나 국민을 중심에 놓고 새로운 시대를 맞겠다는 각오와 다짐일 것이다. 국민들은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정상범 논설위원 ssa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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