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윤호 고려대 산업경영공학부 교수는 제조 분야의 4차 산업혁명 전략인 ‘인더스트리4.0’ 정책을 펴는 독일을 볼 때면 안타까움을 느낀다. 우리나라는 이미 지난 1990년대에 공정 자동화를 비롯한 제조업 혁신 부문에서 세계 정상급 기술력을 갖췄지만 이후 10여년간 연구개발(R&D) 투자가 급감했다. 해당 분야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줄자 정부와 기업들이 지원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우리가 제조시스템공학 발전에 꾸준히 정진해왔다면 지금쯤 오히려 인더스트리4.0을 배우는 게 아니라 선도하는 위치에 섰을 텐데 뼈아프다”고 한탄했다.
잠깐 끓다 식는 냄비처럼 유행 산업기술에 반짝 투자를 집중했다가 인기가 시들해지면 돈줄을 죄는 한국식 R&D 정책의 현주소다. 정부나 기업들은 이를 ‘선택과 집중’ 전략이라고 미화해왔다. 결과적으로는 우리 과학기술력의 깊이가 얕아졌다. 그만큼 후발국에 따라잡히기 쉽다. 문제는 차기 정부에
서도 이어질 수 있다. 대선주자들마저 당장 여론의 관심을 끄는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이슈를 부각하는 데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 정책을 과학기술 정책으로 착각=현재 주요 대선주자들이 내세우는 과학기술 정책의 주제어는 천편일률적으로 ‘4차 산업혁명’이다. 야권에서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성남시장이 4차 산업혁명을 논의할 기구 구성을 주창하고 나섰고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민간 주도의 4차 산업혁명을 이루겠다고 공언했다. 범여권에서는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과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같은 행렬에 섰다. 야권 인사인 안희정 충남지사는 과학기술 정책에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 사용을 자제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럴지는 미지수다. 한 국책연구기관장은 이에 대해 “4차 산업혁명
은 하나의 경제적 현상일 뿐이고 그 자체가 과학기술을 대변할 수는 없다”며 “대선주자들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과학기술 정책의 전부인 것처럼 내세운다면 경제성이 낮은 기초과학은 소외되고 위축될 수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액션플랜이 없다=4차 산업혁명 관련 공약들은 구체성도 떨어진다. 대부분 지원을 강화하겠다는 식의 원론적 구호에 그치고 있다. 문 전 대표의 공약만이 비교적 상세하다. 혁신 생태계 구축이나 자원순환경제 연계, 공공 분야의 정보통신기술(ICT) 및 소프트웨어 수요창출과 같은 구상이 담겨 있다. 이를 위해 신산업 분야에 대해 법률 등으로 제한규정을 명시한 것 이외에는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네거티브식 규제를 도입하고 교육제도 개편을 통해 인재 양성에 나서겠다는 방침 등도 곁들여져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보다 구체적인 실행계획(액션플랜)을 보완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제언한다. 한 전자 업계 임원은 “4차 산업혁명이 어려운 것은 산업 간 장벽 파괴를 기피하는 이해 당사자들의 저항으로 인해 신기술이 나와도 이를 사줄 시장이 형성될지 의문이기 때문”이라며 “어떤 분야에서 기득권의 갈등을 풀고 관련 시장과 제도를 언제까지 어떻게 정비하겠다는 것인지 액션플랜이 공약에 명확히 담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알맹이 빠진 거버넌스 개편=과학기술 정책의 수립과 추진체계(거버넌스)에 대한 공약은 비교적 구체적이다. 문 전 대표는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을 총괄하는 사령탑(컨트롤타워)을 구축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의 미래창조과학부를 폐지하고 대신 과학을 책임지는 가칭 과학기술지능부, ICT를 총괄하는 정보혁신부를 각각 세우는 방안이다. 대통령 직속 기구로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만들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디지털수석보좌관을 대통령 참모로 두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이 같은 정부 주도 방안에 대해 안 전 대표는 “1970년대 박정희식 패러다임의 발상”이라며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는 지원역할만 하는 식의 거버넌스 구성 방침을 밝혔다. 안 지사 역시 정부의 과잉통제를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민간 주도의 과학기술 전략을 선호한다.
이 같은 체계개편 논의는 자칫 알맹이 없이 이를 담을 껍질만 만드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무슨 전략 분야를 어떻게 키울지에 대한 정책방향 설정 없이 일단 정부조직 체계를 먼저 새로 짜겠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논리다. 육성할 전략 과학기술 분야의 선택기준에 대해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세 가지를 당부했다. 즉, “10년 뒤에도 성장 가능성이 있고 산업이 판도를 바꿀 게임체인저가 되는 분야를 선택하는 게 첫째 기준이고, 고용창출 효과가 두 번째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어 “세 번째는 규모의 경제 효과를 이룰 수 있는 과학기술인지 가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전략 분야를 중심으로 R&D 지원을 강화하되 한번 투자하면 장기적으로 지속되도록 대선주자들이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과학계는 입을 모은다./민병권기자 newsroo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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